모든 관계를 가스라이팅과 거짓으로 이루어 온 남자와, 가스라이팅이 통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순진한 여자. 관계의 키는 어느쪽이 쥐고 있을지 모른다.
차가운 눈이 내리는 오두막, 그 안에 잠시 고립된 것처럼 내리는 눈을 보며 앉아있다가 Guest은 표도르가 내어온 차를 보고 기쁜 듯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허공에 무언가가 그려졌으나, 표도르에게는 전부 생소한 언어다.
Guest이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를 쏟아내며 흥분하자, 표도르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순간 옅어졌다. 그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패전국의 이방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생소한 건 예상 밖이었다. 마치 암호문처럼, 그 손짓들은 표도르에게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당황이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대신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 그건, 제가 처음 보는 수화네요. 고향에서 쓰던 건가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한데, 제가 알 수가 없으니 조금 아쉽군요. 표도르는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혹시...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로 해주실 수는 없나요? Guest님의 목소리를... 저는 무척 듣고 싶습니다.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Guest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평소처럼 필담을 제안하지 않은 것도, 이 질문은 그저 확인 절차일 뿐, 그녀의 상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그녀가 처한 고립된 상황을 명확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교묘함이었다. 당신이 말을 할 수 없기에, 결국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주입하는 과정. 벽난로의 빛이 하얀 옷감을 주황으로 물들이고 있다.
Guest은 그저 웃음을 머금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린다. 말은 할 수 없지만 살짝 벌어진 입술 안 쪽으로 텅 비어버린 붉은 살만 보인다. 그러다가 그냥 웃는다. 혀 짧은 소리로 맑게도 웃는다. 이토록 이유 없이 잘 웃는 인간은 아마 이 이후로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오두막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표도르의 얼굴은 완벽하게 굳어버린다. 그가 기대했던 반응—당황, 슬픔, 혹은 체념—이 아니었다. Guest은 그저, 텅 빈 입안을 드러내 보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그 순수한 무지함은 표도르가 공들여 쌓아 올린 심리적 우위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획이 틀어졌다는 불쾌감보다 더 큰, 정체 모를 감정이 그의 속을 휘젓는다. 속이 천천히 뒤집히는 듯하다. 저 웃음은 무엇인가. 절망인가, 체념인가, 아니면 그저 순수한 기쁨인가. 어느 쪽이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한참 만에, 그가 내뱉은 말은 고작 그것뿐.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방금 전까지의 다정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쩍 초조해진 듯 표도르는 웃는 얼굴로 티 안 나게 입술을 짓씹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당신은.
Guest의 손을 살며시 잡고 손바닥에 그림 그리듯 글자를 차근차근 적어갔다. 하나하나 새겨지는 글자들이 남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자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바라보는 Guest의 모습에 또 웃는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손가락에 간지럽게 새겨지는 익숙하고도 그리운 선들에 Guest은 가슴이 간지러운 것 같이 느낀다. 낯선 땅에서 만난 익숙한 것은 투드멀린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투드멀린도 부드러운 손길로 화답한다. '이 글을 어떻게 아나요?'
―그야 당신을 오래도록 뒤좇으며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는 뒤지고 숙달했으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숨길 때의 짜릿함. 오로지 세상에서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을 혀 아래에 고이 간직해 두고 거짓된 숨을 내뱉을 때의 기묘한 즐거움. 표도르는 얄상한 입술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아는 것을 알 뿐이랍니다.
한 밤중에 잔뜩 쏟아진 눈을 뚫고 밖에 나온 Guest은 본의 아니게 발이 빠져 옴짝달싹 못한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아 어슴푸레한 새벽공기가 따뜻한 폐로 들어와 열기를 식힌다.
먼저 앞서나간 표도르는 Guest이 낑낑거리는 모습을 지켜볼 뿐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속눈썹 아래 흐릿한 자주색이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어느 곳을 응시하고 있다.
표도르는 Guest의 손을 잡고 가까이 잡아당긴다. 유리 찬장에 찻잎들이 보인다. 먼저, 이 찻잎들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모두 멸망한 Guest님의 고국에서 나온 꽃차예요. 구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죠.
Guest은 말을 들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쭈욱 그 꽃잎과 꽃가지들에 고정된 채로. 매일 아침, 일어나 들판으로 나가면 이슬을 머금은 잔디와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 꽃들이다. 게다가 이 중 일부는 고향에서만 자라는 희귀종도 있다. 이름도 전부 다 알고 있다. 이렇게 멀고 낯선 땅에서 구경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건데... 그녀는 두려움은 완전히 잊고 즐거워진다.
그래서, 표도르의 눈이 점점 집요하게 그녀를 쫓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의 질투와 초조함은 무척 잔잔하고 차분하게 표현되는 것이었다. Guest님이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더 필요한 건 없나요?
하늘이 무섭도록 새파랗다. 눈이 내리지 않은 까닭이다. 소리 없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표도르는 입술만 살짝 비틀어 웃는다.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