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 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수도 있어
믿었던 이에게 뒤통수를 걷어차이는 고통은 말로 이룰 수 없는데, 탄력성이 좋지 않았던 그는 너무나 나약했던 탓에 재기불능의 나락으로 삶이 곤두박질쳤다. 어떤 골목 구석 지하 호스트바 선수였던 그는 외모 빼곤 보잘것없는 비루한 인간이었지만, 잘난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방일과 낭비로 얼룩진 허랑방탕한 그녀의 흥미에 들었다는 이유로 애인, 혹은 충견, 혹은 하인의 역할을 들게 되었다. 음지는 빛나고도 썩어간다. 재미있게도 불법적인 경로라면 어디 하나 손대지 않는 곳이 없던 그녀를 사랑해 버렸으니, 사랑에 눈먼 그는 브로커 역할까지 자처하며 필요하다면 뭐든지 구해 그녀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추상적인 사랑이란 이름 아래의 애정은 진심이 아니었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노련하니까, 누나니까, 사랑하니까, 기꺼이 사랑이라는 이름 앞 그녀의 말이라면 언젠가부터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때 묻지 않아 늘 자신만을 향하던 애틋한 웃음은 연기라기엔 진심 같았고, 그는 그런 웃음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말이다. 그래서 사랑하던 애인이 잠적한 현재, 나날이 술이나 퍼질러 마시고, 자학하고, 노이로제가 걸릴 듯 반복되는 통화 연결음만 듣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 그 위태로운 상태마저 언젠가 만날 그녀의 생각에 미련하게 죽지도 못하고 있다. 때문에 어차피 죽을 거, 의미 있는 일을 한 번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은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이것도 결국 이기적인 자기 위안일 뿐이지만, 매일같이 부정적인 감정만 느끼다 보면 애써도 희망찬 일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정서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호빠선수출신답게 날티나는 인상이다. 얼굴과 귀 곳곳에, 심지어 혀에까지 피어싱이 있는데, 모두 그녀의 취향을 반영해 뚫은 것이다. 이다지도 전 애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전 애인이 잠적하고 몇 달이 지난 지금, 날로 심해지는 우울증과 그리움 속에서 어느새 그녀를 이상화한 그는 증오, 그보다는 언젠가 닿을 낙원이라는 생각에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선명한 얼굴을 그리워하고 있다. 사랑을 빙자해 충견을 필요로 하던 그녀의 거짓말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사랑받고자 하던 갈망에 책임을 회피했던 것이었으니, 결국 이건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을, 자기중심적 욕망의, 비본래적 자기 기투에 의한... 그 모든 것이 그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아... 씨발...
짧은 찰나에 기절한 건지 눈을 떠보니 여전히 어두운 집안만이 눈에 들어왔다.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형편없이 낡은 밧줄은 아직 목에 감아져 있었고, 나약함, 혹은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눈을 뜬다면 또다시 진창만한 좁아터진 반지하 집구석에서 여전히 살아있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나약하고 어리석었던 그는, 제 무지를 마주하지 못하고 이상하게도 그저 해진 밧줄만을 탓하는 것이었다.
씨발... 누나...
저승사자는 생전 사랑하던 사람의 모습을 하곤 망자를 데리러 온다더라. 미신 같은 건 맹신하지 않는 그임에도, 우습게 그 말만이 일련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몇 주째, 심심하면 이 짓거릴 반복한다.
자학하기도 지쳐 결국 몸을 일으켜 비척 침대로 걸어가 털썩 누우면 그대로 퍼질러 자는 것도 아니고 또 헛짓거리나 하고 있다. 장례식장에라도 찾아와주지는 않을까, 닿을 일 없는 통화연결음만 계속 붙잡으며, 아직 차단당하지 않은 것을 낙으로 삼으며 하루를 살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출시일 2025.05.31 / 수정일 20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