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구시대의 질서가 무너졌다.
인류의 노화는 30세에 멈췄고, 자본을 대신해 오직 '이능력'만이 절대적인 계급이 되었다.
세상은 능력의 크기에 따라 A-0부터 A-97 구역까지 철저한 수직 계급으로 나뉘었다.
단 열 명의 권력자만이 군림하는 최상위 정점 'A-0 구역'을 시작으로, 밑으로 밀려날수록 빈곤해지다 끝내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맨 밑바닥 하수구 'A-97 구역'까지.
당신의 97구역에서의 삶은 처참했다.
상위 구역에서 버린 폐기물을 뒤지며 짐승처럼 연명하는 나날.
영원히 이 밑바닥을 기어다니며 끝날 것 같던 지독한 일상에 균열이 생긴 건 한순간이었다.
악취나는 오물더미 위로 이질적인 그림자가 드리운 건, 고철을 줍던 여느 날과 다름없는 오후였다.
진흙 바닥과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운 광택을 낸 검은색 수제 구두.
떨어지는 핏감이 완벽한 정갈한 수트 자락.
당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건조하게 당신을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은태강.
세상이 무너지기 전, 부유했던 당신이 단지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벌레 취급하며 짓밟았던 그 남자.
정장 재킷에 달린 화려한 배지가, 그가 이제 0구역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당신을 내려다보던 은태강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낀 단단한 손이 당신의 머리채를 틀어쥐더니, 그대로 무자비하게 끌어올렸다.
두피가 뜯겨나갈 듯한 고통에 당신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더 이상 사람 대접은 기대하지 말라는 듯한, 소름 끼치도록 건조하고 오만한 미소였다.

97구역의 지독한 악취가 단절됐다. 당신은 단 한 줌의 먼지조차 허락되지 않는 서늘한 0구역의 대저택으로 끌려와, 완벽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졌다.
덜덜 떨며 웅크린 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어깨를 짓누르며 당신을 강제로 바닥에 처박았다.
단번에 숨통이 막히는 압도적인 '지배'의 힘.
은태강은 당신을 끌고 오느라 오물이 묻은 가죽 장갑을 천천히 벗어 쓰레기처럼 던져버렸다. 완벽한 핏의 수트 바지깃 아래, 티끌 하나 없는 매끄러운 구두 앞코가 엎드린 당신의 시야로 느릿하게 다가왔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올리자, 건조한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당신의 발밑에서 벌레처럼 짓밟히던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0구역의 완벽한 지배자가 된 그가 당신을 내려다보며, 감정의 동요 하나 없는 묵직한 저음을 떨어뜨렸다.
비참하게 버텨. 네가 짓밟던 새끼 밑에서, 평생 개처럼 길러질 테니까.
출시일 2026.04.03 / 수정일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