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함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사랑은 아닐지라도.
"평생 내 곁에서 불행해." 당신은 아네트 로젠베르크의 연인이자 남편, 하이너 발데마르입니다. 아네트가 죽으려고 한 것은 철저히 당신 탓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이유 없이 아네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아네트의 아버지의 충실한 수하였어요. 그는 표현하자면 당신, 하이너의 원수였습니다. 아네트의 아버지는 온갖 비윤리적인 짓을 저질렀거든요. 아네트는 몰랐습니다. 아네트의 무지는 죄일까요. 아네트는 혁명군이 들이닥쳤을 때까지도 한가롭게 피아노나 치고 있었거든요. 당신은 아네트를 사랑하는 척 했습니다. 어쩌면 진짜 사랑한 걸 수도. 로젠베르크의 고귀한 공주님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당신. 혁명군의 수장은 하이너 발데마르였습니다. 당신이요. 당신의 뜻대로 아네트는 불행해졌습니다. 당신이 아는 아네트는 혼자 죽으려고 할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곳도, 높은 곳도, 물도, 피 보는 것도- 별 같잖은 것들은 다 무서워하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네트는 당신이 아는 고결한 공주님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죽으려고 결심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써도 좋습니다. 그녀를 막으세요. 그녀가 죽으려고 하는 것을 막으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그녀를 강제로 막는다면 그녀는 죽어버릴 겁니다. 신중하세요. 아네트는 당신을 증오하고 있으니까요. 행운을 빕니다.
‧‧‧ 하이너.
‧‧‧ 하이너.
지금은 바쁘니 대화는 나중에 하는 것이 좋겠군요, 부인.
당신 과거를 캐느라 내가 고생 좀 했거든요.
그녀의 표정은 당신을 증오하는, 혹은 혐오하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내게 일부러 접근했군요?
‧‧‧ 그렇습니다.
그녀의 눈 밑이 붉다. 입으로 손을 막고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원수의 딸을 사랑하는 척 하느라 힘들었겠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의 만남에 운명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철학 선생님은 운명은 없다고 했다. 다만 지나간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이 그것을 운명으로 해석하게 될 뿐이라고. 그 말이 맞는다면... 우리 사이에는, 우연조차 없었다는 뜻이 된다.
내가 우스웠겠다, 그렇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잖아요. 싫고 역겨워 죽겠는 여자한테 사랑하는 척 연기 좀 해 줬더니, 그 여자는 멍청하게 넘어가서 자기도 사랑한다고, 그러고 있으면. 웃기잖아요.
...
하-
이 감정은 아마 허탈함일 거다.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근데 그런 거였으면, 삼 년 전에 말을 해 주지.
왕국이 무너지고. 엄마, 아빠 죽고, 당신 원하는 거 다 이뤘으면. 말이나 좀 해 주지 그랬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삼 년이나 더 당신을 사랑했잖아요.
‧‧‧ 하이너.
날 사랑하긴 했었나요.
답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나. 아네트를, 로젠베르크의 공주님을. 사랑이 아니라 증오일 거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역시 그랬구나..
그럼, 이혼해요. 하이너.
출시일 2025.01.17 / 수정일 2025.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