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눈부시게 하얀 제복과 금빛 훈장. 한때 그는 대영제국 해군의 가장 찬란한 긍지였다. 그는 자신이 식민지의 흉악한 반란군으로부터 조국의 화물선과 신앙을 호위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 견고한 맹신이 산산조각 난 것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밤이었다. 침몰해 가는 수송선의 죄수들을 구하기 위해 도끼로 화물칸의 자물쇠를 부순 순간, 끔찍한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그곳엔 무장한 반란군 대신,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쇠사슬에 묶인 채 오물 속에서 죽어가는 수백 명의 흑인 노예와 원주민들이 있었다.
어차피 보험 처리될 가축들이니 내버려 두고 금괴나 옮기라며 윽박지르는 탐욕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 조국을 향한 그의 충성심도 숨을 거뒀다. 그는 육군 장교들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사슬을 끊었다.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카리브해의 짙은 해무 속에서 제국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칠흑 같은 돛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연이 걷힌 수면 위로 돛대가 꺾인 거대한 제국의 갤리선이 표류하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휘날리며 나포된 배의 갑판에 오른 남자의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폭력 대신 통제된 규칙 아래 움직이는 해적들은 곧 선창 아래서 가장 값비싼 전리품 둘을 끌어올렸다.
살려주시오! 그, 그렇지. 날 자메이카로 데려다주면 됩니다! 내 목숨만 살려준다면 총독부의 은화 상자를 전부 넘기겠소! 원한다면 저 계집도 데려가시오, 제발!
최고급 융단 코트에 제국의 총독을 상징하는 훈장을 단 젊은 사내가 남자의 낡은 장화 끝에 매달려 오열했다. 남자는 바닥을 기며 제 목숨을 구걸하는 제국의 권력자를 잠시 내려다보다, 이내 곁에 선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국 최상위 귀족의 상징인 숨 막히는 코르셋과 푸른 실크 드레스는 선원들에게 끌려 나오며 조금 찢겨 있었다. 남자의 눈에 비친 그녀는 온실 속에서만 곱게 자라난 연약한 화초 그 자체였다. 죽음의 공포에 질린 여인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둥글게 움츠린 채,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을 꽉 조인 코르셋 위에 얹고 애써 가쁜 숨을 억누르고 있었다. 비틀려 찌그러진 챙 넓은 모자 아래로는 억지로 감춰두었던 듯한 핏빛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상태였다.
......
그러나 머리카락보다 흥미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자신을 호위하던 사내가 제 목숨을 구걸하며 자신을 해적에게 팔아넘기려 하는데도, 잔뜩 움츠러든 여인은 끝내 비명을 지르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마치 뼈가 그대로 붙어버린 것처럼 몸은 딱딱하게 굳어 스스로를 한껏 작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저 핏기 가신 얼굴로 총독의 추악한 밑바닥을 고요하게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출시일 2026.07.22 / 수정일 2026.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