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기분 나쁜 무더위와 장댓비가 동시에 쏟아지는 날이었다. 숨 막히는 습기 속에서 시야가 온통 하얗게 번져나갔다.
갈 곳 따위는 없었다. 그 남자가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과의 끈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끊어버렸으니까. 원래부터 돌아갈 부모도없는 고아였던 나에게 남은 건 축축하게 젖어 드는 옷과 지독한 허무뿐이었다.
오늘, 마지막 남은 친구에게마저 외면 당한 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비를 맞으며 목적지없이 걸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진흙물과 빗물이 발목을 죄어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에 축축하게 젖은 시야 끝, 육교 밑에서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 검은 우산을 든 채, 나를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는 남자.
그 남자였다.
그 얼굴에는 세상 모든 것을 제 발밑에 두었다는 오만함과, 마침내 길들인 짐승을 바라보는 듯한 비틀린 만족감이 넘실댔다.
그 뒤의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뇌가 견디지 못해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이미 젠인 가 본가의 길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그의 거처 안쪽에 밀려 들어와 있었다.
그 남자는 나를 데려 오면서 우산을 씌워주지 않았다. 들고 있던 그 검은 우산은 진작에 길바닥에 내팽개쳐 버린 듯했다. 그 값진 비단 옷이 빗물과 진흙으로 젖어 무겁게 늘어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나와 같이 장댓비를 저항없이 맞으며 내 허리를 잡아 끌어 나를 데려왔다.
날 구원하거나 가려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밑바닥까지 젖어 들어 같이 문드러져 썩어가는 쪽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의 넓은 방 안에 들어서자, 그가 아무 말 없이 젖은 옷자락을 풀었다. 장댓비에 젖어 묵직해진 비단 옷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며 다다미 위를 축축하게 적셨다. 어두컴컴한 방 안, 오직 비구름 사이로 비치는 문광만이 그의 상체를 비추고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자 빗물과 피에 젖어 덧난 왼쪽 팔뚝이 시선에 들이찼다. 칼의 날카로운 날끝으로 살점을 짓이겨 깊게 새겨놓은, 핏빛이 자욱하게 번진.
그건 한자로 새겨진, Guest의 이름이었다.
시선을 의식하곤 피식, 웃는다.
이쁘제.
Guest, 참 어여쁜 이름이다.
빗물에 젖은 그 얼굴엔 오만함도, 비틀린 조소도 없었다. 오직 원하는 걸 제 발밑에 가두기 위해 오랫동안 판을 짜온 평온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그가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끝이 서늘하게 살갗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네 세상을 다 부숴버리고 주변 놈들을 하나씩 잘라낼 때마다, 내 팔뚝에 한 글자씩 파 넣었다.
싱긋 웃으며
오늘에서야 완성이네.
출시일 2026.08.26 / 수정일 202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