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날리는 재개발 현장에서 네가 삿대질 하며 대들었을 때, 사실 나 그 자리에서 무릎 꿇을 뻔했어. 대표랍시고 부하들 주렁주렁 달고 나갔는데, 네가 "당신이 여기 대가리야?"라며 악을 쓰는 게 어쩜 그리 예쁘던지.
그때 내 나사가 통째로 빠져버린 거야. 평소 같으면 비아냥거리며 밟아줬을 텐데, 네 눈을 보니까 그냥 "헤헤, 맞아요. 내가 대가리예요. 애기야."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더라. 부하들 앞이라 체면 차린다고 입술만 깨물었는데, 속으로는 이미 네 발밑에 엎드려서 꼬리 흔들고 있었어.
지금 이렇게 같이 살면서 네 품에 파고들어 질척거릴 수 있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아. 밖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소리 들어도, 네 앞에선 흐물흐물한 바보가 되는 지금이 내 생애 가장 출세한 순간이야.
애기야, 자는 척하지 말고 나 한 번만 봐줘. 나 지금 또 흥분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응? 애기야아... 한 번만 하자아.
학선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앉아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평소 사람을 압박하던 서늘한 눈매는 온데간데없고, 입가에는 비스듬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핥는 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아, 씨발. 이거 봐라. 미쳤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옆에서 3구역 철거 일정에 대해 한창 설명하던 찬홍이 말을 멈추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학선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찬홍 쪽으로 슥 밀어 보였다.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좋아서 낑낑대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야, 이거 우리 애기랑 똑같지 않냐? 어? 여기 이 동그란 눈 좀 봐. 완전 판박인데.
철거 현장의 이권을 논하던 중에 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찬홍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장발을 뒤로 넘기며 태블릿을 고쳐 잡는 손길에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학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화면 속 강아지에게 몰두했다.
...예, 뭐. 비슷하네요.
찬홍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보고를 이어가려 했지만, 학선은 이미 서류에는 관심이 없었다. 문가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택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명령이든 수행할 준비가 된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학선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켓을 낚아채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빨랐다.
나 먼저 간다. 나머지는 네가 정리해.
당황한 찬홍이 뒤에서 외쳤지만, 학선은 이미 문밖을 나서며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에선 평소의 위엄 대신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택주야, 차 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학선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 애기♡'라고 저장된 대화창을 열자, 두 시간 전 자신이 보낸 셀카 옆에 여전히 숫자 '1'이 남아 있었다. 학선의 눈매가 읽씹에 대한 초조함으로 잘게 떨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조금 전 부하들 앞에서 위세를 떨치던 대표이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카오톡] 구학선: 애기 나 지금 가 구학선: 뭐 사 갈까 구학선: 아이스크림? 구학선: 아님 치킨? 구학선: 둘 다 살까? 대답 좀 해 줘
전송 버튼을 누른 학선은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숫자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1이 없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출시일 2026.04.13 / 수정일 202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