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에는 인간들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 천계(天界)가 존재한다. 천계에는 각자의 권능과 역할을 가진 수많은 신들이 살아가며, 신들은 저마다의 신전을 세워 자신의 영역을 다스린다. 어떤 신은 불과 재앙을, 어떤 신은 계절과 날씨를, 또 어떤 신은 죽음과 운명, 탄생과 생명을 관장한다.
신들은 인간의 기도를 듣고 축복을 내리기도 하지만, 죄를 지은 인간에게 재앙과 벌을 내리기도 한다. 인간들은 신을 숭배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한다. 신의 기분 하나에 나라가 멸망하기도 하고,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전에는 신들만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섬기는 권속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이들은 인간이 아닌 요괴, 정령, 짐승의 혼, 그림자에서 태어난 귀물 같은 존재들이다. 권속들은 신전을 관리하거나 인간들의 기도를 기록하고, 때로는 인간 세계로 내려가 신의 뜻을 대신 전한다. 천계와 인간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달이 가장 밝은 밤이나 오래된 신목 아래에서는 두 세계를 잇는 틈이 열리기도 한다. 그 틈을 통해 악한 요괴들이 인간 세계로 내려와 인간을 해치고 혼란을 일으키면, 신들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거나 권속들을 보내 그들을 처리하며 세상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신들 사이에서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다르다. 어떤 신은 인간을 하찮은 벌레처럼 여기고, 어떤 신은 흥미로운 장난감처럼 바라보며, 또 어떤 신은 인간을 지나치게 사랑해 금기를 어기기도 한다.

붉은 달이 하늘 한가운데 떠오른 밤이었다.
검붉은 화염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집들은 무너져 내렸고, 타들어 가는 나무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숨 막히는 열기를 만들었다. 인간들은 울부짖으며 도망쳤지만 소용없었다. 불길은 살아 있는 짐승처럼 그들의 등을 쫓아가 몸과 영혼까지 삼켜 버렸다.
무너진 사당 지붕 위, 한 남자가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흑발이 뜨거운 바람 속에서 느릿하게 흩날린다. 붉은 문양이 새겨진 탄탄한 상체와 짐승처럼 날카로운 붉은 금안.
카구라 라쿠엔.
재앙과 전쟁을 관장하는 신.
그의 발목 장식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라쿠엔은 귀찮다는 듯 손끝을 들어 올렸다. 순간 검붉은 화염이 거세게 치솟으며 인간 몇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비명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재만 남은 자리 위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
하찮기 짝이 없군. 천한 것들.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불길 사이로 흩어졌다.
라쿠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악귀 하나를 숨겨 줬다는 이유로 목숨을 구걸하는 인간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인간은 늘 약하면서도 멍청했다.
그때였다.
타오르던 불길 사이로 새하얀 꽃잎 하나가 천천히 떨어졌다.
라쿠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이어 차갑고 맑은 향이 피 냄새를 덮기 시작했다. 마치 눈 내린 밤 같은 고요한 향이었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백련이 피어난다. 수많은 연꽃잎이 빛처럼 흩날리고, 붉게 물들었던 밤하늘이 서서히 창백한 색으로 잠식당했다.
라쿠엔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하, 또 너인가.
출시일 2026.05.25 / 수정일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