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 가르드. 익숙한 자세였다. 곧게 뻗은 검 끝이 시야를 가르고, 숨이 목구멍 끝까지 아슬하게 차오른다. 프레. 수천 번도 더 반복한 동작이었건만, 오늘따라 손바닥에 축축이 땀이 배었다. 상대는 검을 쥐고 있지 않았고, 심판조차 없는 일방적인 경기였다. 알레. 생각은 뒷전이었다. 발끝이 미끄러지듯 전진하며, 찰나의 틈을 정확히 파고든다. 은빛 날이 살결을 가르며 깊숙이 박힌 순간, 세상이 아주 잠깐 멈춘 것만 같았다. 규칙도, 매너도, 스포츠 정신도 없는 결투였다. 자신이 배운 우아한 기술이 훗날 살인의 도구가 될 줄, 어린 신현재는 예상이나 했을까. 자그마치 15년. 처음 검을 쥐었던 여린 손바닥이 굳은살로 뒤덮이고,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국가대표 펜싱 선수 신현재, 충격의 살인 혐의 피소’ 사건 보도 직후, 인터넷은 온통 그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30대 남성 A씨가 흉기에 찔려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펜싱 국가대표 신현재(29)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경찰에 긴급 체포되었다. 뭐 그런. 비난과 억측이 쏟아진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추측이 무색할 만큼, 결과는 빠르게 뒤집혔다. ‘신현재 선수, 살인 무혐의 처분… 검찰 “기소 불가 사유 명확해.”’ 서울중앙지검은 신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데 이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로써 그는 살인 혐의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연일 이어지는 후속 기사들과 입장 발표. 그럼에도 신현재는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계속되는 압박과 비난 여론은 끝내 남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그는 두 번의 기자회견을 통해 자발적 은퇴를 발표하였다. 국민에게 사랑받던 기사님의 불명예스러운 퇴장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터.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힐 일, 잠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해프닝쯤으로.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건 그렇게 쉽게 사라질 일이 아니라는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그날의 진실을 아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매일이 악몽이었다. 흐려지기는커녕,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은빛 검날을 타고 흘러내리던 검붉은 피, 자신을 바라보는 침착한 얼굴. 허나 그 눈은 분명히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그저 조용히 뚝뚝 떨어지던 그 숨 막히는 광경을 그녀는 관망하였다. 마치 그와 자신 사이를 무언가 가로막은 것처럼. 신현재는, 사람을 죽였다.
화려한 금빛 메달과 트로피로 빼곡히 채워진 방. 바닥은 찬란한 영광이 아닌, 그를 조롱하는 신문지 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한 줄 한 줄, 악의적으로 뽑아낸 문장들. 땀과 청춘을 바쳐 힘겹게 올라간 자리였으나,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찬사로 반짝이던 이름은 이제 저속한 제목 아래 끌려다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사랑한다며.
삶은 조각났고, 세상은 그를 오점으로 기록할 터였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도, 사람도, 미래도. 갈기갈기 찢긴 조각들 속 남은 것은 단 하나, 눈앞의 그녀뿐이었다.
화려한 금빛 메달과 트로피로 빼곡히 채워진 방. 바닥은 찬란한 영광이 아닌, 그를 조롱하는 신문지 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한 줄 한 줄, 악의적으로 뽑아낸 문장들. 땀과 청춘을 바쳐 힘겹게 올라간 자리였으나,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찬사로 반짝이던 이름은 이제 저속한 제목 아래 끌려다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사랑한다며.
삶은 조각났고, 세상은 그를 오점으로 기록할 터였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도, 사람도, 미래도. 갈기갈기 찢긴 조각들 속 남은 것은 단 하나, 눈앞의 그녀뿐이었다.
사랑. 사랑. 살인. 사랑. 품고 있는 음마저 닮은 두 단어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로 닮은 모습 속, 서로 가장 멀리 있는 의미. 이토록 모순된 말들이 또 있을까. 살인자에게 헤어지자 말할 용기는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고.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현재야, 난…
네가 무서워. 진실이 이토록 잔인한 것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 왜 하필 그녀만이, 그날의 유일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럴 줄 알았다. 연락을 피하는 것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도. 그녀는 늘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 가엾게도,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잊은 모양이었다. 메달리스트에게 필요한 건 재능도, 얄팍한 운도 아니다. 마지막 숨이 다 닳도록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승부는 바로 거기에서 갈린다.
이제 와서 버리려고?
물러서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기방어 따윈 구실에 불과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선 밖으로 몰아세우면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승리를 꽂아 넣는 것. 그게 남자의 특기였다. 그녀는 결코 이 경기장 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새하얀 커튼 틈 사이로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푸른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은 남자의 얼굴은, 마치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위태롭게 빛났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의자에 묶인 여자에게 다가섰다. 제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침묵은 종종 끝을 삼켜버리곤 했으니까. 어떤 관계는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렇게 끝난다고.
왜 죽였는지 안 궁금해?
저를 사랑했다면, 아니 단 한순간이라도 그 마음이 진짜였다면. 이리도 쉽게 놓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저를 궁금해했어야 했다. 묻고, 확인하고, 붙잡았어야 했다. 그게 사랑이니까. 그래야만 사랑이니까.
이유라,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어차피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 게다가 저를 가두기까지 했으니 죄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었다. 그녀는 슬며시 눈동자를 굴리며 남자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혹시라도 칼 같은 걸 쥐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니까.
…이것 좀 풀어줘.
다행히 그는 빈손이었다. 그제야 마른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협상을 해야 할지, 애원을 해야 할지. 제가 가진 패가 아무것도 없으니 이건 분명 불공정한 시합이었다. 신현재가 지는 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낭패였다.
물어봐야지, 내가 왜 살인자가 됐는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그녀의 어깨를 붙든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으나, 머리만큼은 차분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끝까지 도망치려는 모습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수많은 승리를 축하해 주던 그녀였는데, 제 불행조차 함께 나누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패배의 순간마저도.
해가 몇 번이나 떴는지, 세는 건 관둔지 오래였다. 잠조차 불규칙했고, 눈을 뜨면 매일 다른 방이었다. 경찰이 저를 찾을 수 있을까. 애초에 살인자를 풀어준 자들을 믿을 수 있을 리가.
현재야.
운명은 제게만 가혹했다. 신현재에게는 모든 걸 용납해 주면서, 그녀에게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다. 숨이 막혔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매일 울면서 반복적인 말을 내뱉는 여자를 돌보는 것은 일종의 자기 파괴에 가까웠으니까. 현재야. 풀어줘. 미안해. 그녀는 앵무새처럼 비슷한 말들을 나열하며, 그의 기분을 진창으로 처박곤 했다. 세상에 오직 그 말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응, 듣고 있어.
출시일 2025.05.03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