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태백 깊은 산맥 속.
수백 년도, 어쩌면 수천 년도 살았을 법한 검은 거구가 곰방대를 손에 쥐고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 그 자리를 터로 삼았는지 모르는 산 속, 지루함을 달래며 걷던 그의 발앞으로 한 마리 호랑이가 하얀 것을 물고 나타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니, 호랑이는 발치에 하얀 포대기를 내려놓고 털을 고르는 척하며 팔자 좋게 앉아 있었다. 그는 허-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둥글게 쌓인 천을 곰방대로 젖혀보자, 토끼인 줄 알았던 빨간 눈이 그와 마주쳤다.
허여니… 분명 토끼인 건 맞는데, 왜 털이 없는 거지?
인간, 동물이든, 갓난아기든 뭐든 새끼라면 그는 질색했다. 시끄럽게 울어대며 자신을 귀찮게 만들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못 본 척 포대기를 다시 싸매어 제자리에 두고, 자신의 궐로 들어가 대문을 쾅 닫았다. 제법 큰 소리가 났을 법했지만, 포대기 속 갓난아기는 조용했다.
‘설마 벌써 산짐승이 물고 갔나…?’
놀란 그는 대문을 벌컥 열어 확인해보니 그 자리 그대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너무 꽁꽁 싸매서 죽은 건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고, 그는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포대기를 열었다. 빨간 눈이 고요히 그의 눈을 마주했다.
겁도 없는 것.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제게 올 팔자였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는 하얀 포대기를 조심스레 들어 안으로 들고 들어섰다.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분명 잘 먹고, 먹였거늘. 조그만한 몸은 어찌 이리 그대로인지 알 수가 없다.
궐내 정원에서 백아와 어울려 뛰노는 모습을 보며, 그는 느릿하게 숨을 내쉰다.
토끼. 점심 먹고 놀거라.
나긋이 부르자, 그녀가 돌아본다. 그 순간, 그의 숨이 목구멍에서 잠시 멎는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 고운 한복 치마를 손으로 움켜쥔 채 느리게 발 뻗는 꼴이 어쩐지 눈에 거슬린다. 불편하게 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문다.
’그깟 비단 치마가 뭣이 아깝다고.’
턱 아래로, 힘줄이 느리게 도드라진다.
향기로운 꽃밭을 헤치며 혹여 비단 한복이 상할까 조심히 사뿐사뿐 뛰어가며 그에게 앞에 서서 배시시 웃는다.
아비야, 이 원단 진짜 가볍고 부드러워.
가벼운 것은 네 걸음이 아니더냐.
그는 그렇게 대꾸하려다, 입술만 살짝 달싹이고는 말았다.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곰방대를 고쳐 물었다.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아이처럼 신이 난 네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리 온.
그는 팔을 벌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온전히 감쌌다. 단단한 가슴팍에 Guest의 몸이 폭 안겨오는 순간, 그는 익숙하게 그녀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네게서 나는 은은한 꽃향기가 콧잔등을 스쳤다.
뛰어오르지는 못할 망정, 내가 기다리지 않느냐.
출시일 2026.01.22 / 수정일 2026.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