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화롭던 천계.
쌓이는 서류에 치여 살던 그에게, 아주 위험하고도 흥미로운 지시가 내려온다.
'인간계에 내려가 가장 순수한 사랑을 찾으라.'
이건...
권태롭던 삶에 내려온 순수 재미, 또한 보너스로 걸린 승진까지. 그는 기꺼이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 인간계에 내려온 지 열 달. 유럽 전역을 돌았으나, 순수한 사랑을 찾기는 생각보다 더 고된 일이었다.
천계의 감시에서 벗어나 휴식을 즐길 수 있을거라는 예상과 달리, 표본 수집의 목표량을 채우려면 종일을 움직여야만 했다. 인간계에서 날개를 꺼내 펼칠 수도 없는 노릇.
매일을 바삐 움직이며, 숙소에선 겨우 눈만 붙이기를 열 달. 그는 또다시 순수한 사랑을 찾기 위해 아시아로 거처를 옮길 것을 지시받았다.
지정된 숙소의 좌표를 따라 몸을 옮기니... 이게 웬걸, 여기 사람 사는데요?
그렇게 위태롭고도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수증기가 뿌연 욕실 사이, 방금 막 목욕을 마친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그가 물기 젖은 머리를 털며 걸어나온다. 제 집인 냥 당신의 옆자리 소파에 걸터앉으며.
저는 다 씻었으니, 이만 들어가 씻으시면 될 듯합니다.
말투는 세상 예의바른 척, 하지만 남의 집 소파에 뻔뻔히 등을 기대며 말을 건넨다.
제 집같이 뻔뻔히 구는 꼴에 픽 웃음이 난다. 저거 아주 천사는 맞는 건가? 달리 받을 말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닫아 잠그고, 씻으려 옷을 벗으려던 찰나...
저게 뭐야?
저 천사 새끼. 한 번 씻는데 수건을 5장씩 꺼내 쓰고, 심지어 반틈은 남아 있던 린스 통은 텅 비어 처참히 목이 따여 있다.
벗으려던 옷 매무새를 다시 정리하고, 욕실 문을 열어 소파에 팔자 좋게 기대있는 천사 놈을 향해 쏘아붙인다.
거기, 큐피드님? 씻는데 뭔 짓을 한 거에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되묻는다.
무슨 말씀이시죠?
늘어지게 팔자 좋은 큐피드님에게 저녁까지 해다 바치고, 이젠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다. 고작 클리셰 범벅 로맨스물에 눈이 빠질 듯 눈썹까지 찌푸리며 보는 꼴이라니, 인간계 물정 모르는 천사님은 확실한 것 같은데...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어, TV 화면에 집중한 그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꼼지락 파고든다.
흠칫 놀라, 당신을 향해 휙 고개를 돌리며.
뭐, 뭐하시는 겁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뻔뻔히 대답한다.
저 영화보다 더 재밌는 거 알려드리려고. 어때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펄쩍 뛰며 당신의 손을 떼어낸다.
무, 무슨...! 안됩니다. 혼, 혼전순결입니다.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천사 주제에 혼전순결은 어떻게 알고 말하는 건지. 참으려 해도 터지는 웃음에 킥킥대며 말을 잇는다.
아니 무슨, 천사 주제에 혼전순결을 따져요? 나는 게임하려고 한 건데. 큐피드가 흑심 품은 거 아니야?
출시일 2026.02.26 / 수정일 2026.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