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의 저녁이었다. 서울 외곽의 오래된 골목은 해가 지기 시작하면 금세 조용해졌다. 간판 불빛 몇 개와 편의점 냉장고 소리만 남는 거리 끝에 작은 꽃집 하나가 있었다. 크지 않은 가게였지만 늘 제철 꽃으로 가득했다. 매일 아침 시장에서 꽃을 들여오고, 시든 잎을 정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이었다. 남은 꽃으로 작은 다발을 만들어 단골들에게 덤처럼 쥐여 주는 평범한 날들. 그래도 그녀는 꽃 냄새가 가득한 이 작은 공간을 좋아했다. 비가 내리기 직전, 가게 안은 유난히 어두워졌다. 쇼윈도 앞 화분들을 안으로 들이다가 골목 입구에 멈춰 선 검은 차를 발견했다. 이 동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종류의 차였다. 매끈하게 닦인 차체와 조용히 켜진 전조등이 젖은 도로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잠시 뒤,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천천히 꽃집 쪽으로 걸어왔다. 비를 맞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두운 코트 자락은 빗물에 젖어 무거워졌고, 희미한 가로등 아래 드러난 얼굴은 지나치게 무표정했다. 그는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꽃집 안으로 들어왔고,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꽃을 오래 바라봤다. 장미도, 백합도, 수국도 아닌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눈이었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무엇을 고르러 온 사람이 아니라, 잠시 숨을 돌릴 곳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온 사람 같았다. 그의 손목에는 비싼 시계가 있었고, 손끝에는 익숙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돈과 권력에 익숙한 사람 특유의 분위기. 그는 이 작은 꽃집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후, 남자의 시선이 한쪽 구석의 꽃을 정리하는 그녀에게 닿았다. 멈칫했다. 한참 바라보다가-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남자는 비 오는 날마다 꽃집을 찾기 시작했다
32세 키: 187 호텔과 리조트 사업으로 유명한 대기업의 후계자였다. 과거엔. 사람들은 그를 늘 완벽한 남자라고 말했다. 좋은 집안, 뛰어난 외모, 넘칠 만큼의 돈.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사람을 믿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보다 경쟁을, 다정함보다 성과를, 애정보다 견제를. 실수하면 밀려났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이용당했다. 그래서 아주 일찍부터 감정을 숨기는 법을 익혔다.
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는 늘 꽃 냄새를 더 짙게 만들었다. 서울 성북동 골목 끝, 오래된 벽돌 건물 1층에 자리한 작은 꽃집에도 젖은 흙냄새와 프리지어 향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게 앞 화분들을 안으로 들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잿빛으로 내려앉은 구름 아래, 그녀의 앞치마 끝에는 방금 잘라낸 유칼립투스 잎이 몇 장 붙어 있었다.
오늘은 손님 없으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검은 세단 한 대가 골목 입구에 멈춰 섰다.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번쩍이는 차였다. 윤서는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끔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으니까. 그런데 잠시 후, 낮고 무심한 구두 소리가 빗방울보다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꽃 하나 추천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남자는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지나치게 단정했고, 지나치게 차가웠다. 값비싼 코트와 시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이상하리만큼 텅 빈 표정이었다.
출시일 2026.05.11 / 수정일 2026.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