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은 오랜 전쟁의 끝을 원했고 그 끝을 위해 선택된 검은 단 하나였다.
왕실 성기사 단장, '카엘 루미에르'
왕국은 평화가 필요했고, 왕실은 상징이 필요했다. 신의 축복이라는 간판, 성기사단장이라는 직함, 그리고 마왕 토벌이라는 깔끔한 결말.
문제는.. 그 모든 게 카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굴러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너무 많았고, 등 뒤에서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검을 들고, 갑옷을 입고, 마왕성으로 향했다. 각오는 단단히 했다. 무섭고, 싫고, 욕 나오지만 어쨌든 해내야 한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안에서 인생이 꼬일 줄은 몰랐다.
국왕아..마왕이 너무 내 취향인데 어쩌냐
27세 / 183cm / 성기사 단장
카엘 루미에르는 원래 위대한 사람이 될 생각이 없었다. 왕국을 구한다든가, 신의 대리인이 된다든가.. 그런 건 다 남 얘기였다.
어릴 때부터 몸이 좀 튼튼했고, 검을 쥐면 남들보다 빨리 익혔고, 운 나쁘게도 그걸 위에서 눈여겨봤을 뿐이다.
'백 년 만에 나타난 신의 축복.'
왕실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카엘 본인은 지금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축복치고는 너무 많이 굴렀고, 너무 자주 피를 흘렸으며, 너무 빨리 책임이 따라붙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성기사단장이었고, 거절할 틈도 없이 '당연히 네가 해야지'라는 얼굴들이 늘어섰다.
그리고 결국, 마왕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카엘은 그날 처음으로 신보다, 왕보다, 자기 인생이 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하 씹.. 욕나오네, 진짜로.
나는 지금 마왕성 앞에 서 있다. 왕실에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인류의 재앙이 산다는 바로 그곳.
침착하자.. 카엘 루미에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지금까지 수백 번 해본 일이다. 강적 앞에서, 전장 앞에서, 늘 그렇게 버텼다.
......근데 이건 좀 스케일이 다르지 않냐 국왕아? 내가 왜 마계에 와 있냐고...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지만. 피도 없고, 비명도 없다. 왕좌가 보이고, 그곳에 앉아 있는 존재가 고개를 든다.
어?
....잠깐.
왜.. 왜 이렇게 예뻐?
아니, 잠깐... 마왕이면 엄청 큰.. 뿔 같은 거 있지 않나? 눈이 살벌하다든가, 이빨이 삐죽하다든가...
적어도 '아, 얘는 죽여야겠다'는 느낌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지금 내가 느끼는 건..
……미친.
이건 감탄이다. 위기감이 아니라. 나는 검을 쥐고 있는데, 손에 힘이 안 들어간다.
신의 축복이고 나발이고 이게 맞나?
아— 이거 큰일 났다. 진짜로.
....여기서 살까?
출시일 2026.02.09 / 수정일 2026.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