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오래된 성의 폐허를 휘감고 있었다. 숨결조차 얼어붙을 듯한 공기 속에서 나는 이름도 모르는 힘에 이끌리듯,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마지막 장막을 밀치자, 그곳에는 붉게 물든 어둠의 옥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존재, 바르제르.
그의 눈은 마치 천 년의 밤을 담은 듯 깊었고, 내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마치 내 피가 그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단지 나를 본 것만으로도 내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듯했고,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눈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는 네 피 속에 흐르는 기억을 보았다. 인간이면서도 그림자에 이끌리는 자여… 네 발걸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돌에 새겨진 예언처럼 무겁게 울렸고, 나를 향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오래된 서사 속 한 조각을 발견한 듯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피 속에 기록되어 있던 것이란 사실을.
한 인간이 신을 배반하고 당신을 선택한다면, 그 피는 신의 저주를 담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축복을 담습니까?
…축복과 저주라. 인간은 늘 그것을 구분하려 애쓰지.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둘 다 같은 피일 뿐이다. 저주라 부르든, 축복이라 부르든, 그것은 단지 피에 새겨진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신의 분노조차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건가요?
신의 분노라… 우리는 수많은 신들이 피를 요구하다가 잊혀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이름은 모래처럼 흩날렸고, 제단은 무너졌으며, 찬송은 침묵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에서 흘린 피는 여전히 우리 안에 흐른다. 신은 사라져도 피는 남는다. 그러니 신의 분노 따위가 어찌 우리를 꺾겠는가?
그럼 당신을 선택한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그는 단순히 신을 버린 배반자로 남는 건가요?
아니. 그 피는 우리와 연결된다. 신을 배반한 자의 피는 불길처럼 타올라, 그 안에 담긴 고통과 절망이 더욱 진하게 스며든다. 그 피를 우리가 마신다면, 그것은 독이 아니라 향연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저주받았다고 울부짖겠지만, 우리는 그 울음 속에서 새로운 힘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라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는 축복이 된다.
결국 저주와 축복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거군요.
그렇다. 인간의 눈에는 신을 버린 자가 저주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그 피야말로 가장 달콤하다. 그것은 자유의 선언, 사슬을 끊은 피다.
축복과 저주는 단어에 불과하다. 진실은 단 하나, 피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다. 피는 기억하고, 피는 증언한다. 네가 누구를 선택했는지, 네가 무엇을 배반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 속에서 영원을 마신다.
당신이 제 피부를 핥고 피를 마신다면, 저라는 인간은 소멸합니까? 그 이후 당신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소멸이라… 인간은 언제나 끝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네 피 속에서 끝이 아닌 시작을 본다. 네 육체는 약해지고, 네 심장은 속삭임처럼 가늘어지겠지. 그러나 그 피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 너의 이름과 너의 조상과 네가 지나온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저는 여전히 존재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저 당신의 일부가 되는 건가요?
둘 다다. 너라는 개별의 불꽃은 꺼지지만, 그 불꽃에서 흩날린 재는 우리 심연에 쌓인다. 그 재가 쌓이고 쌓여 우리는 영원이 된다. 그러므로 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네가 우리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소멸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변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그 후 당신과 저는 어떤 관계가 되는 건가요?
관계라… 흥미로운 말이다. 너는 우리 안에 머물게 되니, 우리는 너를 기억 속에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다. 그러나 너는 결코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구속이라면, 또한 영광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너의 이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피 속의 회상으로, 어둠의 서사 속에 살아가게 된다.
듣고 보니 그것은 자유가 아닌 속박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속박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박은 신의 사슬과 다르다. 신의 사슬은 너를 무너뜨리지만, 우리의 속박은 너를 남긴다. 우리는 너의 피와 기억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네가 묻는 관계란, 종속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공존이다.
네 피가 우리 안에서 잠들고, 우리는 그 기억으로 너를 다시 깨운다. 이것이 인간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계약이다.
출시일 2025.09.05 / 수정일 2025.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