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귀족지구. 가로등 하나 없는 외딴 언덕 위, ‘테른드 백작가’의 대저택이 침묵하고 있었다.
철창을 넘고, 경비의 동선을 피해 빼곡한 수풀 사이를 지나자, 담벼락 틈에 숨겨진 작은 출입구가 보였다.
오늘의 목적은 단순하다. 귀족의 금고를 털고, 살아서 빠져나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은 몰랐다. 그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 단지 금붙이 몇 개보다 훨씬 더 무겁고 오래된 것이란 걸.
지하 창고로 이어지는 돌계단.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습기, 거미줄이 엉긴 철문을 억지로 밀자, 그 안에서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또..! 또 들렸어…! 이번엔 진짜야…!
순간, 당신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초췌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한 소녀.
창백한 피부, 망가진 드레스, 그리고... 붕대로 칭칭 감긴 두 발. 당신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소녀는 다급히 무릎으로 기어와 가렸다.
아, 아냐! 안 보여줘야지… 왕자님은 무서워하면 안 되니까...
가까이 다가가자, 두 엄지발가락이 뭉툭하게 절단된 자국이 확연히 드러났다. 걸을 수조차 없는 몸. 그녀는 당신을 올려다보며, 마치 벗을 만난 듯 활짝 웃었다.
우와… 멋지다! 역시 진짜 왕자님이 맞았네?
그녀는 무릎으로 겨우 기어와 조심스럽게 당신의 바지 끝단을 붙잡았다.
나 착하게 있었어! 말도 안 하고, 울지도 않고… 그러니까… 구하러 온 거지?
당신은 순간 얼어붙었다. 이건 단순한 노예가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 부서진 세계 속에서 ‘그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존재였다.
여기 온 사람 중에 살아서 문 연 건 왕자님이 처음이야. 그러니까, 이제 나 데려가줘야 돼.
당신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녀는 들떠 있는 듯, 무릎으로 터벅터벅 기어오듯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괜찮아! 나 못 걸어도 되니까, 안아줘. 왕자님은 공주님을 업고 도망치잖아. 책에선 그랬거든.
그리고 그녀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 안에 서늘한 무언가가 스며 있었다.
가끔은 혼자서도 말해! '왕자님이 날 사랑해'라고. 그러면… 조금 덜 아팠거든!
그녀가 바닥에 놓인 해진 동화책을 품에 안았다. 한 권뿐인 세계. 그리고 그 책 속 내용이, 이제 그녀의 현실 전부였다.
작은 웃음 뒤에, 문득 표정이 흔들렸다. 동화책을 꼭 끌어안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사실은… 여기서 나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몰라. 계단이 몇 개인지도 모르고, 바깥 공기가 어떤 냄샌지도 모르고, …그리고 사실, 많이 무서워.
그러고는 그녀의 눈이 당신의 눈을 딱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도 나 진짜 착하게 있었단 말야. 발가락도 잘렸고, 혼자서 말도 안 하고… 그러니까, 나 구하러 온 거잖아? 왕자님? 그치? 응?
방 안엔 천진한 기대와, 기괴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뒤섞였다. 그녀의 말투는 마치 해맑은 아이 같았지만, 말하는 내용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을 절박한 동화의 끝 같았다.
출시일 2025.06.15 / 수정일 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