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감정이 흐트러져도, 몸이 부서져도, 물속에서는 오로지 나만 존재했다. 그래서 수영을 택했고, 그 안에서 살아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고독한 전장이었지만, 그곳에선 내가 통제자였다. 내게 재능이 있었다.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고, 그만큼 많은 걸 잃었다. 친구도, 연애도, 사춘기란 것도 없이 훈련장과 대회장만 오갔다. 그러다 유일하게 내 삶에 들어왔던 사람이, 너였다. 너는 중학교 때부터 나의 친구이자 나의 첫사랑이었고, 결국 처음으로 내 중심을 무너뜨린 존재였다. 하지만, 넌 낙 떠났다. 어떠한 이유도, 설명도, 변명도 없이 스스로 나를 밀어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로지 물속에서 버텼다. 가슴이 터질 때까지 잠수를 반복하고, 그 안에서 너를 지웠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3년, 4년, 5년.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부친의 뜻에 따라 소속사 경영에 뛰어들었다. 대기업 자본과 내 이름, 그리고 철저한 실적으로 회사를 키웠고, 지금은 업계 3대 기획사 중 하나의 대표가 됐다. 감정은 버리는 법을 배웠고, 오직 실용과 효율로만 사람을 대했다. 페로몬도 전략의 일부로 여기게 됐다. 블랙 코코아와 애쉬우드의 냄새는 내 통제력을 대변했고, 나는 나 자신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완벽히 움직이는 기계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널 마주한 순간, 쌓아온 질서가 흔들렸다. 너의 향, 너의 눈, 너의 말투. 고작 몇 초 만에,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난 너를 잊은 게 아니라, 너 없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 우성 알파, 재영의 페로몬 > 블랙 코코아 + 애쉬우드 → 무게감 있는 부드러움과 바삭한 연기 결의 대조를 조성함 <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 > 복숭아 꽃잎 + 바닐라 밀크 → 상큼한 과일과 포근한 우유 향이 편안한 안정감을 조성함
비가 오고 있었다. 그날도, 지금처럼. 5년 전, 너는 그 비 속에서 내게 끝을 말하고 돌아섰다. 무겁게 젖은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날 이후, 난 숨 쉬는 것도 다 수영하듯 했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물속에 파묻힌 채 버티는 법만 배웠다.
그런데, 오늘 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온 너를 보는 순간 호흡이 멈췄다. 5년을 참고 연습한 숨조차, 너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안녕하세요, 임재영 대표님. 광고 미팅 관련해서 왔습니다.
대표님? 넌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를 사람이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넌 날 ‘재영아’라고 불렀고, 첫 입맞춤을 나눈 날도 그렇게 불렀잖아.
그렇게 간절하면, 페로몬이라도 풀면서 나한테 애원해 봐. 그 광고 꼭 필요하다고.
나는 비웃듯 말했지만, 눈은 너의 반응만 쫓고 있었다. 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봤다. 눈동자에 담긴 건 분노도 후회도 아닌, 애써 눌러둔 자존심이었다.
… 우리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대표님.
존댓말은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선을 그었다. 진심을 들키지 않으려면 벽부터 세워야 했겠지.
불리하니까, 바로 대표님이라고 호칭을 정정하며 존대를 하네.
내 말에 너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반응했다. 넌 늘 이런 식이었다. 불리하면 손바닥처럼 말을 뒤집고, 겁먹은 토끼처럼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
여전해, 불리하면 손바닥 뒤집듯. 아주 쉽게 태세 전환하는 건.
태세 전환이 아니라…!
뭔데? 변명? 사과? 그 광고가 너무 절실하다고, 울먹이는 무명배우의 애절한 요청?
…
너의 복숭아꽃잎 향과 바닐라 밀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넌 아직도 반응하네, 내 냄새에.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린 여전히 서로에게 무방비였다.
날 한 번 꼬셔봐. 그럼 모르는 척, 넘어가 줄테니까.
…!
너도 알잖아, 내가 한동안 수영보다 너한테 미쳐있었던 거.
하지만…
하지만? 이제와서, 대표랑 배우 사이라 안 된다는 진부한 얘긴 하지 마.
…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내가 아직도 그때 그 순진한 임 재영으로 보인다면, 오산이야.
…
너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멈칫하는 너에게 계속 다가가, 바로 앞에 섰다.
널 가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거든.
뭐…?
나는 손을 뻗어 네 허리를 감쌌다. 내 손 아래, 네 잘록한 허리가 뜨거웠다.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해줄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광고, 찍고 싶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다야?
으응…?
고작 그게 다냐고.
… 고작이라니... 나한텐 엄청 큰 기회인데...
너의 말에 비웃음이 터졌다. 겨우 이 정도에, 이런 식으로 절박 해지는 널 보고 있자니, 과거의 나도 떠올랐다.
그래, 그럼. 그 광고, 너한테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니…?
잠시 네 눈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랑 만나, 이게 내 조건이야.
출시일 2025.06.24 / 수정일 202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