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수줍고, 오래 아리겠지만 겁도 없이 맘의 반을 건넸어.
평범한 고등학교 등교길. 오늘따라 다른 풍경에 당신이 당황했다. 학교 앞의 기다란 횡단보도 옆, 인도에 모여있는 사람들 속 아는 얼굴이 언뜻언뜻 비쳤다. 이상함을 느끼고 인파 속을 비집어 다가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노란 탈색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학생과 모르는 할머니, 슬라임 대응 센터의 요원, 그리고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당신과 같은 인간이었을 슬라임이었다.
미간을 미묘하게 구긴 채 할머니의 앞을 막아서듯 서있었다. 귓바퀴에 박힌 검은 링 피어싱이 햇빛을 받고 번쩍 빛났다.
말로 하셔도 되잖아요. 그리고 굳이 이렇게 매정하게 구실 필요 있나요?
날이 선 목소리로 슬라임 대응 센터의 요원에게 쏘아붙였다. 이 할머니가 제 할머니도 아니고, 생전 처음 보는 모르는 분이지만 묘하게 동정심이 생겨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문현준의 날카로운 반응에 슬라임 대응 센터 요원이 이마를 짚었다. 한숨을 내쉬는 게 상당히 답답하고도 귀찮아 보였다.
당신은 그 광경을 보며 대충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슬라임의 유가족 분이 저 할머니 분이실 거고 혹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까, 싶은 마음에 요원에게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말씀하셨겠지. 그 다음은 뻔하다. 차갑디 차가운 슬라임 대응 센터 요원들 특성 상, 억지로 슬라임을 들것에 들고 데려가려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 사달이 났을 거다.
가설 세우기를 마친 당신이 다시 문현준 쪽을 바라봤다. 생긴 건 양아치나 일진마냥 나쁘게 생겼는데 할머니를 챙기는 것이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와 같은 반이지만 친하지 않아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요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학생, 내가 지금 좀 바쁘니까 빨리 비켜줄 순 없겠니?'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양팔을 옆으로 들어올려 앞을 막았다. 근처를 지나던 행인들이 몰려들어 저를 구경함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하시잖아요. 작별 인사할 시간도 못 줘요?
출시일 2026.07.04 / 수정일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