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느리다. 느린 바람은 기억을 잘 데려온다. 골목 끝 자판기,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작은 화단,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하는 나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들이 전부 낯선 얼굴을 하고 서 있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이 달라졌을 뿐이다.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변한 건 언제나 사람이다. 오늘도 현관문 손잡이는 차갑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금속의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다. 문 하나. 겨우 이만한 두께의 벽 하나가 안과 밖를 나눈다. 바깥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걷다가도, 문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호흡이 한 번 멈춘다. 오늘도 별다를 건 없을 것이다. 평범한 저녁. 평범한 집. 평범한 하루. 그런데 평범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확인하려 든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안다. 기대는 실망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감정이니까. 이건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 이유를 잊어버릴 만큼 익숙해진 습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아무 말 없이 남겨진 감정.
······ 에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출시일 2026.06.28 / 수정일 2026.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