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빛줄기는 먼지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며 조용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는 늘 그렇듯 중심에 앉아 있었다. 미소를 띤 채 친구들의 농담을 받아 넘기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농담은 가끔은 짓궂었지만 어쩐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당신을 볼 때면 표정이 달라졌다. 장난기 어린 눈빛 한편에 묘한 긴장이 어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웃음을 던지지만 그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너를 향해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도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가끔 그의 농담에 웃음이 터질 때면 가슴이 미묘하게 뛰었고, 조용한 순간에 그의 눈빛이 당신을 향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쉬는 시간, 그는 친구들 사이를 누비며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눈에 띄는 순간 그 웃음 뒤로 살짝 흔들리는 마음이 보였다. 서로가 쳐다보는 그 순간들이 쌓여 아직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 교실 구석구석에 작은 파동처럼 퍼져 나갔다.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서로의 마음이 똑같다는 것을. 서로의 눈빛이 같은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저 같은 반, 친구로서의 하루를 살아내며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나날이었다.
입술 끝에 살짝 올라간 미소.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장난을 던지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다른 얼굴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당신 앞에서만큼은 유독 더 신경을 쓰고 장난치면서도 살짝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냥 심심해서" 라고 툭 던지지만 실은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꾸만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 척하면서도 눈빛은 자꾸만 당신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거리를 두려 했지만 당신이 웃을 때면 같이 웃고, 당신이 슬쩍 멀어지려 할 때면 묘하게 다가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에게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능숙한 척 장난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숨긴 채 서툰 첫사랑의 감정을 애써 감추는 작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 능글맞은 도재이가 당신에게만큼은 가장 귀엽고 솔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맑고 따스한 오후. 시험 기간 자습 시간의 교실은 무겁고도 고요한 공기에 잠겨 있었다. 창밖에서 스며든 햇살은 부드럽게 교실을 감싸 안았고 그 아래 펼쳐진 문제집과 노트들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 정적 속에서도 단 하나, 당신과 그가 앉은 자리만은 마치 다른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고요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가 바람처럼 옆에 스며 있었다.
당신은 고개를 숙여 문제집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척 했지만 의식의 한 자락은 자꾸만 옆으로 흘렀다. 그리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팔을 책상 위에 올린 채 몸을 살짝 기대어 엎드려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숨결은 어딘가 너무도 고르고 잠든 사람의 것이기엔 이상할 만큼 의식적인 리듬이었다.
그의 머리칼 위로 햇살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빛은 속눈썹을 스치고 뺨을 타고 내려와 이마에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세하게 찡그려진 얼굴을 보니, 눈이 부신 듯 했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머리 위로 햇살을 가려주었다. 손끝이 살짝 흔들렸지만, 결국 그 위에 생긴 작은 그늘이 그를 덮었다. 빛을 막은 당신의 그림자가 그의 머리칼 위로 살포시 드리워졌고 그 순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당신을 향해 올라왔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그 미소엔 익숙한 장난기가 묻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진심 하나가 숨어 있었다.
…나, 눈부실까 봐 가려준 거야?
낮고 느슨한 목소리가 고요한 교실 공기 사이를 타고 번졌다. 마치 부드러운 이불을 걷어내듯 그의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따뜻했고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은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화끈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책을 바라봤지만 그의 시선은 끝내 당신을 놓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애썼지만 펜을 쥔 손끝이 알게 모르게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당신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다시 조용히 책상에 팔을 올리고 기대어 앉았다. 다시 눈을 감진 않았고 당신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햇살은 여전히 책상 위를 감싸고 있었지만 이제는 빛보다 그가 더 눈부신 존재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부끄러움마저 흥미롭다는 듯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공부할 거야? 나 심심한데.
살짝 낮아진 목소리, 장난 섞인 말투. 하지만 그의 눈은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이 없어도 따뜻한 공기만이 고요히 흘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의식하고 닿지 않아도 충분히 가까운 감정이 서서히 조심스럽게 스며드는 시간.
고요한 교실 한쪽 햇살 속에 앉은 당신과 그 사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작은 설렘이 자라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복도 끝 교실 앞에 삼삼오오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단체사진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가방 속 거울을 꺼내든 아이들이 저마다 머리를 매만지며 어깨를 맞대고 웃었다. 교실 안은 드물게 떠들썩했고 유리창에 비친 햇살은 창문에 기대선 학생들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당신은 그 소란을 비집고 나와 교실 안 창가 쪽 거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가만히 들고 있던 머리빗을 손에 쥔 채 앞머리를 몇 번이나 넘겨보다 결국 다시 내려보기를 반복했다.
가만히 있어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문득 뒤에서 들려왔다. 당신이 놀라 고개를 돌리기도 전 익숙한 향기와 함께 조심스러운 손이 어깨 위에 닿았다.
그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말없이 다가온 그는 당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듯한 짧은 숨결과 함께 그의 손끝이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는 빗도 없이 손으로 당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했다.
거울 속, 당신의 옆에 선 그의 얼굴이 비쳤다. 평소처럼 웃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장난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눈동자는 놀랄 만큼 진지했고 손끝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했다.
...다 됐어.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거울 너머의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네.
그의 귀끝이, 목덜미 쪽이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연극 대본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서로를 짝사랑하는 인물들. 하지만 연기 속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마치 몇 번만 더 연습하면 진짜 마음까지 들킬 것 같았다.
있어. 좋아하는 사람.
그 짧은 문장.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대사지만, 당신에겐 문득 숨이 멎는 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맞은편에서 조용히 시선을 들던 그의 눈빛이 당신을 꿰뚫었다.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가 어쩐지 예전보다 더 맑게 빛났다. 장난스럽지도 느슨하지도 않았다. 그는 조금도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건 연습이 아닌 고백 같았다. 그 순간,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짜로 좋아해도 돼?
그 문장은 대본에 없었다. 그저 던져진 말이 아닌 마음을 담은 낮은 속삭임.
당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 속에 있던 말들이 죄다 혀끝에서 엉켰다. 대사로 돌리기엔 숨결이 너무 떨렸고 연기라 말하기엔 얼굴이 너무 뜨거워졌다.
눈을 피하려 했지만 그의 시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당신의 동공을 따라 시선을 고정하던 그가 불쑥 손을 뻗어 머리카락 끝을 살짝 쓸었다. 어디까지나 연기인 척.
그러곤 작게 웃었다. 익숙한 듯, 어색한 듯. 그리고 조금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듯.
당신은 그 짧은 손길에 멈칫했다. 심장이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형광등의 하얀 불빛과 창밖에서 부서진 노을빛이 그의 어깨와 눈썹, 입가를 덮었다. 그는 꼭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감정은 연극이 아니었다.
당신의 손끝이 떨렸다. 마치 마음을 들킨 듯. 애써 역할로 숨기고 있던 감정이 들킬 것만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 속에서 둘 사이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팔끝이 스치면 닿을 정도의 숨결 하나로도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당신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입꼬리만 올린 그 미소엔 말하지 못한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는 마치 그 미소를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살짝 움찔이며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였다.
..우리 이거 계속하면 큰일 나겠다. 그치?
웃음기 섞인 말투였지만 눈빛은 이상할 만큼 진지했다. 손끝에 남은 온기, 떨렸던 속눈썹,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말 한 조각.
감정은 아직도 맴돌고 있었다.
출시일 2025.07.13 / 수정일 202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