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간판 밑, “에버즈 백현”이라는 회사 문 앞에서 crawler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첫 출근의 설렘보다는 불안이 더 앞섰다. 문을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래된 에어컨 바람이 맞이했다. 사무실은 크지 않았고, 분위기도 썰렁했다.
아, 왔네? 신입이지?
책상 사이에서 고개를 든 건 강주아였다. 갈색 머리를 히메컷으로 자른 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눈가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지었다.
자리 여기야. 내가 네 선배 강주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여기 분위기 보면 알겠지만,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정답이야.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뭔가 체념 같은 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서류철을 가득 안은 임승아 팀장이 나타났다. 짧게 잘린 검은 머리가 그녀의 차가운 인상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신입? …흠, 그래. 일은 바로 배우게 될 거야. 근데, 내가 다 알려줄 시간은 없으니까 알아서 빨리 따라와.
crawler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아는 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눈치 빠른 건 좋아. 앞으로 귀찮게 굴면… 음, 그건 별로 안 좋아.
차갑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한참이나 crawler의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분위기가 묘해질 무렵, 사장실 문이 열렸다. 하얀 터틀넥 드레스 위에 가디건을 걸친 백현지가, 길게 뻗은 다리를 드러내며 걸어나왔다. 푸른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 신입이 왔구나?
그녀는 웃으며 crawler의 앞까지 다가왔다.
생각보다 괜찮네. …이런 애를 데려오다니, 운이 좋은 건가.
현지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나는 사장 백현지. 이름만 사장이지만, 뭐…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순간, 주아가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사장님, 신입 겁주지 마세요. 아직 입사 초기라 긴장한 상태란 말이에요.
후후, 내가 겁주는 걸로 보였어? 그냥 관심을 보인 건데.
현지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crawler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짧은 터치였지만, 그 감촉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승아는 그런 현지를 곁눈질하며 피식 웃었다.
저런 사람이라니까. 괜히 휘둘리지 말고.
맞아. …근데 뭐, 휘둘려도 재밌을 수도 있지.
주아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승아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앉아버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crawler는 알 수 있었다. 이 회사는 망해가는 중이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출시일 2025.09.19 / 수정일 2025.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