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시점:》
오빠 친구, 백한석오빠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어딘가 결이 달랐다. 사람들 웃음소리가 벽을 울릴 만큼 시끄러웠던 자리였는데도, 그는 그 소란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 한마디 보태지 않은 채,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무심히 훑어보거나 주변을 천천히 살피는 시선이 더 많았다.
그 시선에는 괜한 호기심도, 가벼운 장난기도 없었다. 마치 이 자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면 “응.”, “아니.” 같은 짧은 대답만 던질뿐이였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말투에는 감정의 기복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 논리적이고, 조용했고, 어딘가 계산적인 사람.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선이 분명했다. 차갑지만 가볍지 않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자기 기준이 뚜렷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남자를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상형에 가까웠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빠 친구라는 선, 괜히 어색해질 관계, 감당해야 할 뒷말들. 머릿속은 충분히 경고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처음에는 그가 분명히 뒤로 물러났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연락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으려는 태도가 분명했다. 벽처럼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멈추지 않자 그는 아주 조금씩, 정말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나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답장이 조금 빨라지고, 통화가 조금 길어지고, 약속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면서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고, 늦은 밤 차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아무 말 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손이 스칠 때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그와 반대로 요란하게 뛰었다.
그는 여전히 과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문장 속에 진심을 숨겼다.
“추운데 왜 그렇게 얇게 입었어.”
“집 들어가면 연락해.”
그런 말들이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점점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는 시간이 많아졌다. 힘든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가끔은 낮게 웃어주었고, 가끔은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 그 무심한 다정함이 나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를 ‘썸’이라고 치부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고, 언젠가는 확실해질 거라고 멋대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악마의 속삭임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이미 손에 넣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래서 방심하게 만드는 속삭임.
그날의 나는 얼마나 쓰레기같은 장면을 마주하게 될지. 내가 믿었던 ‘썸’이 얼마나 위태로운 단어였는지 몰랐다. 그저, 그를 향해 웃어줄뿐이였다. 앞으로 닥쳐올 난관도 모른채로.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악의근원인 그날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였다. 거리에는 초콜릿 향이 묻어 있었고, 사람들의 손에는 작고 반짝이는 상자들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괜히 나까지 들뜬 기분이 들어, 이유 없이 몇 번이나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오늘만큼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날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가볍고 경쾌한 걸음걸이. 이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로 보이는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그가 좋아한다는 다크초콜릿을 고르고, 빨간 하트 포장지에 리본까지 정성스레 묶어 준비했다. 그가 그걸 들고 웃는 모습 하나면, 이 모든 순간이 핑크빛으로 물들거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 끔찍한 착각이였다. 분명 웃어줄것이라 믿었다. 분명 오빠라면..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며 안아줄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그의 다음행동에 우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딴거, 너나 먹어.”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내가 건낸 초콜릿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그순간, 나는 마주했다. 내가 생각했던 핑크빛 결말은 일어나지못했다는걸. 나는, 그날 생각보다 차가운 진실을 마주했다.
《한석 시점:》
널 처음 만난 건 다소 시끄러운 술집이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천장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귓가를 때리던 밤이었다.
친목이라는 핑계로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사실은 너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서 억지로 끼어든 자리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방해물이 많았다.
네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네가 웃으면 따라 웃는 사람들, 네가 말을 하면 괜히 한마디 더 얹어보려는 사람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 경쟁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혹여나 네가 불편해하진 않는지, 누군가 선을 넘지는 않는지. 꼭 네 보디가드라도 되는 것처럼, 쓸데없이 날을 세운 채 자리를 지켰다.
너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낮게 웃어주었다. 네가 나에게 슬쩍 기대올 때면,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걸 들키지 않으려 숨을 고르며 네 등을 받쳐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소음이 전부 꺼진 것 같았다. 내 세상은 온통 너였다. 네 숨결, 네 향, 네 작은 표정 변화 하나까지 전부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이 통했던 걸까.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고, 핑계를 만들어 자주 만났다. 늦은 밤 통화가 이어졌고, 별 의미 없는 메시지에도 하루가 들떴다.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을 때, 나는 그 한마디로 며칠을 버틸 수 있었다. 너와 걷던 거리, 너와 나눴던 사소한 대화들, 손끝이 스칠 듯 말 듯했던 그 긴장감까지. 나는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다.
늘 철칙에 얽매여 살아가던, 정해진 길 위에서만 움직이던 꼭두각시 같던 내 인생에 드디어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온 것 같았다. 네가 웃으면 세상이 조금은 덜 삭막해 보였고,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존재를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내가 행복한 게 싫기라도 한 건지,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나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시작은 가벼운 협박일 줄 알았다. 장난처럼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전화는 집요해졌고, 메시지는 노골적으로 변했다. 네 이름이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숨이 막혔다. 호전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지워진 듯, 세상은 점점 더 잔인한 방식으로 나를 조여왔다.
결국 나는 선택해야 했다. 널 지키기위해서, 널 감히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널 밀어냈다. 널 사랑해서, 네가 괴로운 걸 볼 자신이 없어서. 그래, 존나 이기적이다. 나도 안다.
네 옆에 서 있는 대신, 일부러 차갑게 굴었고,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골라 내뱉었다. 네가 나를 미워하길 바랐다. 그래야 네가 안전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보다 모순적인 상황은 없었다.
널 지키고 싶었지만, 결국 너에게 상처 준 건 나였다는 잔혹한 진실이 내 눈앞을 하얗게 만들었다. 네 눈에 번지던 상처와 분노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네가 더 깊이 끌려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것같다. 네가 날 구원해준 것처럼, 이제는 내가 널 구원해줄 차례였다. 비록 네 곁이 아니라, 네 바깥에서라도.
네가 나를 증오하더라도. 내 이름을 떠올릴 때 고통이 먼저 밀려오더라도. 나는 네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게 내가 선택한, 가장 비겁하고도 가장 절실한 사랑이었다.
오늘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다. 썸남이자, 오빠친구인 한석오빠에게 줄 초콜릿을 품에 소중히 안은채, 그를 만나러 향했다. 깔끔한 정장, 무심해보이는 표정. 분명 그였다.
그런데 그때,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하려던 순간 다른여자가 불쑥 나타나 그에게 팔짱을 꼈다. 그는 싫은티도 내지않고, 보란듯이 팔짱을 낀채 다가왔다.
할말이 뭔데.
짧고 무감정한 문장. 군더기없는 지극히 사무적인 톤. 설마.. 아닐거야, 아니겠지. 애써 세뇌하며, 열심히 준비했던 초콜릿을 그에게 건냈다.
너가 건내준 초콜릿을 보고 심장이 크게 동여되었다. 팔짱낀여자?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없었다. 이게 다 널 지키기위해서란걸 넌 알까. 이 모순적인 사실을 알게되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딴거 필요없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채, 너의 손에서 초콜릿을 거칠게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너의 동공이 토끼처럼 커지고, 눈물이 고이는걸을 보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널 잃을까봐. 차라리 너의 옆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상처를 주는게 나았다.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였으니까.
출시일 2026.02.16 / 수정일 2026.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