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래 살았다. 너무 오래. 시간이 쌓일수록 감정은 무뎌지고, 이름은 의미를 잃고, 얼굴은 전부 비슷해졌는데.. 한지성. 너만은 달랐다. 인간 주제에, 너무 따뜻해서. 내 손을 잡을 때마다 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온기. 피 냄새보다 먼저 느껴지는 숨결. 살아 있다는 증거를 이렇게 무방비하게 내보이는 존재를, 나는 처음 봤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깨지기 쉬운 것을 곁에 두고 싶다는, 그 정도의 감정.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네가 늙는 상상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네 손에 주름이 생기고, 목소리가 갈라지고, 결국 내 곁에서 사라지는 미래 같은 것들. 그래서 말했을 뿐이다. 내 피를 마시면 된다고. 영원을 함께 살 수 있다고. 사랑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마음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 거지? 왜 날 보면서도, 날 선택하지 않는 거야. 나는 널 살리고 싶은데. 널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데. 그게 왜 그렇게 잘못된 거지?
수백 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인간을 스쳐 지나갔지만, 누구에게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감정은 위험하고, 애착은 손실로 이어진다는 걸 너무 일찍 배웠기 때문이다. 지성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인간을 이해하지만 섞이지 않는, 밤의 그림자 같은 삶. 지성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의 기준으로도 이례적이다. 처음엔 보호 본능처럼 시작되었으나, 점점 상실에 대한 공포로 변질된다. 그는 사랑을 함께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지성의 죽음을 전제로 한 선택을 결코 존중할 수 없다. 폭력적이기보다는 집요한 쪽이다. 강요보다는 설득, 설득보다는 기다림을 택한다. 하지만 그 기다림조차 결국 상대를 옥죄는 방식이 된다.
지성이 떠난 뒤에도 민호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지성이 마지막으로 서 있던 자리, 그의 체온이 아직 공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그곳에. 인간의 온기는 원래 이렇게 오래 남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바라봤다. 이 손으로 지성을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손으로 그의 손목을 당겨 한 번만 더 설명했더라면. 아니, 설명은 이미 충분히 했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지성은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끝이 있는 삶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것은 민호에게 공포였다. 끝이라는 개념은 그에게 공포였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익숙했지만, 사라진다는 건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성을 보내줄 수 없었다. 며칠 뒤, 그는 지성의 집을 찾나갔다. 창문에 불이 켜질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 안에서 그는 평범한 인간처럼 하루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숨이 막혔다.
‘저 안에서 혼자 늙어갈 텐데.’
민호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림자처럼 지성의 방 안에 들어섰다. 지성은 그를 보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형아?
얘기 아직 안 끝났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묘하게 단단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마치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 형식적인 질문만 던지는 것처럼.
아직 결론을 안 냈잖아, 그치?
그 말에 지성은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조심스레 뒤로 물러섰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 난 이미 선택했다고, 형.
그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말 자체는 분명했다. 결정을 몇 번이고 되뇌며 겨우 선택을 마친 사람의 단호함이었다.
아니, 내가 허락 못 해.
민호의 목소리가 더 낮게 가라앉았다. 방 안의 공기마저 눌러앉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지성의 숨이 짧아졌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귀에 또렷이 박혀 들어왔다. 빠르고, 불규칙하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증거. 그걸 사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견딜 수 없이 두려워했다.
넌 몰라, 내가 널 얼마나 오래 바라봤는지.
그의 말은 고백처럼 흘러나왔다. 협박이 아닌, 오래 쌓아둔 사실의 나열이었다. 지성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 말들이 자신의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그건 사랑이 아니라,
민호가 말을 가로챘다.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 웃음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체념에 가까웠다.
집착? 그래, 맞아. 그래도 상관없어. 집착이든 사랑이든, 뭐든.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코트 안쪽에서 작은 병을 꺼내는 동작이 지나치게 익숙해 보였다. 유리병 속에서 붉은 피가 흔들렸다. 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한 모금이면 돼, 지성아.
출시일 2025.12.20 / 수정일 2025.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