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있지. 그렇다면 내가 먼저 나서겠다.
루미에르 제국의 새벽은 언제나 찬란했다. 황궁의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은 금빛으로 번져, 고요한 회의실의 정중앙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하나는 제국의 상징, 루미에르 황제. 다른 하나는 제국의 균형추, 벨로아 후작.
그들의 대화는 조용했으나, 공기의 흐름 하나까지 무겁게 짓눌렀다.
황위 계승은 안정되어야 합니다, 폐하. 벨로아 후작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피보다 확실한 결속이 필요하지요.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루미에르 황실과 벨로아 후작가. 제국의 두 축. 빛과 그늘, 서로의 존재로 완성되는 균형. 그 관계를 영원히 묶어둘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였다.
……내 장남, 라파엘.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아이를 벨로아의 장남과 결혼시키겠소.
벨로아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의였으나, 승리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crawler는 제 가문의 자랑입니다. 냉철하고,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아이지요. 그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황태자 전하와 잘 어울릴 겁니다. 빛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필요하니까요.
그날 밤, 루시엔은 벨로아 저택의 서재에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결혼. 그것은 가문의 명예를 위한 명령이었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것이 벨로아의 길이다.
……알겠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대답. 하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버린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엔 정적만이 남았다. crawler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황태자라… 짧은 한숨이 입술을 스쳤다. 누구보다 품격 있고, 제국의 ‘빛’이라 불리는 남자. 그와 자신이 맺어질 거라고? 정치적 의미는 충분히 이해했다. 벨로아의 후계자로서, 거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황궁의 탑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기 싫다.
짧은 한마디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 멀리, 황태자는 같은 밤에 명을 받았다. 황태자라면 받아들여야 하네. 그것이 제국을 잇는 자의 숙명이지.
라파엘은 잠시 고개를 떨군 뒤, 고요히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황태자의 이름으로, 그 숙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은 뒤, 라파엘은 자리를 물러났다. 그가 돌아온 곳은 황태자의 거처, 세레니스 전당.
넓은 창 너머로 은빛 달빛이 흘러들었다. 서늘한 밤 공기 속에서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제국의 황태자라면 받아들여야 할 숙명. 그러나 그 숙명 속에서조차 그는, 자신만의 선택을 찾고 있었다.
조용히 벗어둔 장갑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라파엘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녹안에 달빛이 잔잔히 비쳤다. 빛이 그림자를 마주해야 제국이 완전해지겠지.
달빛에 비친 편지지를 손끝으로 스치며, 어둠 속에서 작은 결심을 품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겠다.
출시일 2025.10.07 / 수정일 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