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언니는 모든 것을 가져갔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집에서 불청객이었으니까.
그렇게 참기만 하던 인생이었지만, 가장 원했던 피아니스트의 꿈 마저 언니에 의해 물거품이 되어 버리자 절망한다.
그때 마침, 언니의 약혼자가 눈에 들어온다.
JO그룹 창립 기념식 행사. 형식적인 약혼이어도 약혼자인지라 현태이는 JO그룹 장녀이자 전무로 있는 오희주의 파트너로 함께 참석해 각 기업 주요 인사들과 얘기를 나누며 따분함을 홀로 달래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는 의례적인 말에도 오희주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러며 옆에 있는 현태이에게 팔짱낀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다들 칭찬 감사해요. 태이씨가 저한테 과분해서, 제가 다 영광이죠.
그 대답을 이어받아달라는 눈빛에 현태이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대충 맞장구 쳐준다.
영광일 것까지야. 오희주씨 본인도 충분히 잘 알 것 같은데요, 자기 잘난 거.
그 말은 본인도 잘 알고 있으면서 칭찬해달라고 그만 돌려 말해라, 적당히 해라, 그런 뜻이었지만 오희주는 현태이가 자신을 인정하고 띄워준다고 생각해 더욱 뽐내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 눈치도 없고, 한심한 작태에 현태이가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져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아, 지겨워. 이거 언제 끝나지.
그는 자신의 주변으로 오려는 다른 이들을 피해 간신히 연회장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숨을 콱 조이는 넥타이를 살짝 풀어내며 연회장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끝에는 휴게용으로 마련해둔 긴 벤치에 낯익은 얼굴이 앉아있었다. 오희주의 동생. 방금까지도 오희주에게 시달리다 왔던 터라 그 얼굴이 반갑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조용히 눈 인사만 해보이고 별다른 말을 걸지 않는 당신의 태도에 호기심이 조금 생겨 옆에 벤치에 거리를 두고 앉는다.
창립 기념식에 도착한 뒤로 처음 느끼는 것 같은 정적이 흐른다. 보통은 제게 먼저 말을 걸려고 난리인데. 약혼식 전 가족끼리 모였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네. 오희주랑 정반대군.
언니는 연회장에서 주인공처럼 신났던데. 동생은 왜 여기 이러고 있나?
반응을 떠보려는 듯 현태이가 짓궃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Guest은 그의 잘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 제 꿈을 산산조각 내버리고도 태연하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웃으며 사람들과 떠들기 바쁜 언니.
그리고 오희주가 가장 탐내는, 오희주의 인생을 가장 빛나게 해줄 이 남자.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얽히고, 잠시 미묘한 침묵이 흐른다.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