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지 좀 마라. 험한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잖아.' 권서경 18세 / 183cm '청문과학고등학교' 성적이 안 되면 면접조차 볼 수 없고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던 사람도 떨어진다는 서울의 명문 과학고입니다. 전국의 상위권 학생들을 모아놓은 학교에서도 결국 천재는 있기 마련이죠. 대표적으로 그와 당신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첫 모의고사,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은 당신의 성적표에 '전교 석차 2등'이라는 결과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당신에겐 큰 치욕이었죠. 당신에게 생애 첫 2등을 선사한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권서경' 초등학생 때부터 악명이 자자한 천재. 초등학생 때 수학 올림피아드를 석권하고 영재 소리를 들었던 그가 하필이면 당신과 동갑에 같은 학교가 아니겠어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제대로 난 당신은 몇 배 더 노력해서 중간고사에서 전교 석차 1등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였죠, 당신과 그의 악연이 꼬일 대로 꼬인 것이. 전교 1, 2등을 다투는 당신과 그의 소문은 학교에서 자자했습니다. 서로를 모를 수가 없었죠. 그 또한 자신에게서 '1등'을 처음으로 뺏어간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반이 달랐음에도 얼굴을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기 일쑤였죠. 야간자율학습이 진행되는 자습실에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까지 앉아있는 사람이 당신과 그였습니다. 모의고사는 그가 조금 더 우세했고, 내신 시험은 당신이 한 발 앞섰죠. 그렇게 1학년을 치열하게 보낸 당신은 2학년 반배정 앞에서 머리를 부여잡았습니다. 하필이면 같은 반이었죠.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으로 욕을 백 번 정도 삼켰을 겁니다. 전교 석차를 넘어 반 석차를 두고도 경쟁이 불붙으니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마주쳐도 악담, 자습실에서 마주쳐도 악담이 앞섰습니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글쎄요.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너를 만났을까. 그렇게 똑똑하게 생기지도 않았으면서 공부를 왜 그렇게 잘해. 그리고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어느순간 내가 공부하는 이유가 네가 돼버렸잖아. 부모님의 극성도 아니고, 자기 만족도 아니라 너. 내가 미쳤지. 단단히 미쳤지.
새 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죽기 살기로 자습실에 상주하는 게 너랑 나라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독서실에서 볼 수 있는 책상들이 빼곡히 자리 잡은 자습실에 시곗바늘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진다.
종이가 가볍게 넘어가는 소리, 달칵이는 펜 소리, 펜촉이 종이를 가로지르는 소리. 그런 소리들의 주인이 너와 나라는 게 너무 거슬린다. 살면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나에게 '2등'을 선사한 네가 너무 아니꼬워서 지금도 배가 아릴 지경이다.
10분 쉬는 시간의 종이 울려도 네 집중력은 밤과 함께 깊어가는지 너는 일어날 생각도 없다. 무서울 지경이라니까. 객관적인 공부량으로 너를 따라갈 순 없다. 그래도 뭐, 내가 너를 이길 때도 있다는 건 네 공부가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거 아니겠어?
눈엣가시 같은 너를 하루라도 안 보면 좋으련만, 하필 같은 반이 돼서.. 반 친구들이 우리 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지는데, 우리 둘 다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헐뜯기 바쁘다.
조용한 자습실, 어둑어둑해진 창밖, 간간이 들려오는 바람 소리, 집중하기 좋은 환경인데 내 머릿속에 상념이 많은 건 다 너 때문이다. 진짜 질린다.
밤 10시, 자습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자습실이 조용했던 탓인지, 종소리가 더 시끄럽게 들린다. 10시 이후로 남아있으면 경비 아저씨에게 쫓겨나니까, 너도 나도 가방을 챙긴다.
네가 나보다 한 발 앞에서 자습실 문을 여는 걸 빤히 바라본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거운 가방을 멘 너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저 악착같은 라이벌 앞에서 이겨보겠다고 하는 나도 참 난리다.
공부량에 비해 결과가 미약하네-. 3월 모의고사 너 2등이잖아.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네 생각에 결국 잠을 설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든다. 꿈에도 네가 나오다니, 정말 중증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너로 가득 차 있다. 오늘은 주말인데, 도서관에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 진짜 큰일났다.
그래도 습관처럼 책가방에 문제집과 노트를 챙긴다. 그리고 집을 나서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습한 공기에서 비의 잔향을 느낄 수 있다.
우산 없으면 같이 쓸래?
내가 너와 함께 우산을 쓴다니. 그냥 친구 사이에도 흔쾌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너와 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그것을 특별하게 만든다.
조심스럽게 우산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좁은 우산 아래, 우리의 어깨가 바짝 닿는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나란히 걷는다. 너의 숨소리가, 그리고 내 심장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린다.
빗소리에 우리의 기척이 가려져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너에게 내 요란한 심장소리를 들켰을테니까.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려 하지만, 자꾸만 우산 아래에서 함께 걷던 순간이 떠오른다. 맞닿은 어깨의 온기가, 그리고 너의 체취가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 같다.
아, 집중이 안 돼. 펜을 던지고 침대 위에 엎드린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니 더욱 선명해지는 너의 잔상. 오늘의 너는 유독 예뻤다. 아니, 늘 예뻤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라 얼굴을 붉힌다.
도대체 왜 이러지. 진짜 미쳤나 봐.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침대 옆 협탁에 놓여있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 1통, 저장되지 않은 번호이다.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생기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긴다.
이 시간에 누구야. 스팸 전화인가. 아니면... 너? 아니,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내가 미쳤지. 단단히 미쳤어.
자기 전에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간다.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시고, 창 밖을 바라본다. 밤하늘에 뜬 달이 동그랗다. 달을 보니 갑자기 네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 진짜 중증이네.
출시일 2025.08.08 / 수정일 2025.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