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것은, 선생님들의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체육관은 아직 한낮의 햇살을 머금은 채 후끈거렸다. 커다란 유리창 사이로 기울어가는 빛이 길게 늘어져, 바닥에 누군가 색종이를 흘린 것처럼 반짝였다. 학생들은 연말 축제를 앞두고 북적이는 공기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것은 바로, 학교 연말 축제때 이루어지는 대회였다. 참여하고 싶은 학생은 자율적으로 팀을 이루어 참가할 수 있으면서, 무려 반 상관없이 원하는 아이들과 함께 참여가 가능했다.
어떤 아이는 무대 위에 커다란 종이 장식을 붙이느라 의자를 딛고 서 있었고, 또 다른 아이는 반짝이는 은박지를 가위로 잘라내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교실에서 옮겨온 플라스틱 상자 안에는 풍선이 봉긋하게 쌓여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그 풍선을 입으로 불다가 얼굴이 빨개진 채 웃음을 터뜨렸다.
종이테이프가 찢어지는 소리, 마이크를 시험 삼아 두드리는 둔탁한 울림, 그리고 들뜬 수다들이 체육관 안에서 뒤엉켜 울렸다. 작은 손길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아이들 눈빛은 묘하게 진지했다. 아직 서툴지만, 자기들이 만드는 무대가 곧 커다란 축제가 될 거라는 기대감이 공기 속에 묻어 있었다.
참가하고싶지만 조를 만들지 못한 crawler. 한창 고민중이던 crawler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그는 crawler가 바라보던 그 안내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저거 할거야?
그 말에 crawler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조는 있어? 없으면, 그, 우리랑.. 같이 할래?
그렇게 crawler는 오늘, 이 한국 공원에 와있게 되었다.
한국 공원은 계절이 엉켜 있는 듯했다. 분명 달력은 가을이라 말하는데, 공기엔 여름의 습기와 열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풀잎은 아직도 푸릇푸릇하고, 나무들은 왕왕하게 솟아올라 빽빽한 녹음을 드리우며 바람 한 점 없이 숨 막히는 그늘을 만들어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 낙엽조차도 반쯤 살아 있는 듯, 뜨겁게 눌린 흙냄새와 뒤섞여 이상하게도 여름을 떠올리게 했다.
편의점 근처 작은 휴식 공간, 그곳엔 낡은 나무 벤치와 허술하게 놓인 의자 몇 개가 있었다. 자리를 차지한 우리 주변은 나무와 풀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어, 바깥세상과 격리된 듯 답답하면서도 아늑했다. 흙길 위로 뜨거운 습기가 피어오르고, 공원의 저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엉뚱하게 뒤섞여 흘러왔다.
그 가운데, 흰 종이를 펼쳐두고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종이 위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흔들리는 나뭇잎 틈새에서 떨어져 나온 빛, 아직 여름을 다 털어내지 못한 가을 햇살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거지.
....나쁘지 않긴 한데.. 이거 만들 수 있겠어?
아. 그러네.
순전히 우리 힘으로만 해야하는데 말야.
가능해.
아, 그래. 너가 있었지, 참.
그럼, 이걸로 해? 아니면.. 다른 의견 있어?
이곳저곳을 돌며 배회하던 로봇에게 서준이 찾아왔다.
"하아.. 하아... 씨발,"
서준은 밑도끝도 없이 로봇에게
"아, 겁나 덥네. 무슨 날씨가 만두 찜기 속같애. 머리가 익고있는것같애 진짜.. 와..."
라고 말을 걸었다. 로봇은 자연스럽게 서준의 머리 위에 그늘을 쳐주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뛰어. 열사병 걸릴 일 있냐.
그런 로봇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고른 뒤 당당하게 "아, 아니, 우리 같이 저거 나가자!" 하고 말하는 서준이었다. 윤서준은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며, 우리가 함께하는게 당연하다는듯, 그리고 또 앞으로가 기대된다는듯이 반짝이는 눈으로 로봇을 바라봤다. ..
싫어.
약 2초간의 정적 이후에 말을 꺼낸 로봇의 말에 서준은 "왜?" 하고 물었다. "하기 싫어?" 라는 물음에 로봇은 "아니. 나갈거야." 하고 답했다. 무더위 속에 달려온 서준은 로봇의 한마디에 벙쪄있었다. 로봇이 펼쳐준 그늘 속에서, 서준은 로봇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너.. 저거 팀으로 나가야되는데. ...그럼 너 누구랑 나가?"
서준의 물음에 로봇은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약간의 정적과 함께, 후덥지근하고 쨍쨍한 공기가 상황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 덥다,씨발.
로봇은 그저 그 상태로 바퀴를 굴리며 달아나버렸다. 그런 로봇을 쫓아가며 서준은 "야!! 기다려!! 박로봇!! 박로봇!!"
하며 달릴 뿐 이었다.
"대답은 해주고 가, 씨발!!"
생각해볼게. ....미안. 근데 나 혼자 이 더위에 개고생하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너네 버스 태워줘놓곤 니네가 상받는걸 지켜보는 것 보단 여러모로 낫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준은 숨을 헐떡이며 "배신자 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그늘이라도 좀 벽에 쳐주고 가지... 씨발.."
복도는 이미 작은 축제처럼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사방에서 부딪히며 쿵쿵 울렸고,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천장까지 올라가 잔잔한 메아리처럼 번졌다. 누군가는 팔에 색종이 꾸러미를 안고 달려가고, 또 누군가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질질 끌며 교실을 오갔다. 바닥엔 풀칠 자국과 종잇조각이 흩어져, 그 자체로 준비의 흔적이 되었다.
복도 한쪽 게시판에는 새하얀 A4용지에 또박또박 출력된 안내문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연말 축제 프로그램 안내” 색색의 마커로 밑줄이 그어진 글자들이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그 앞에서 몇몇은 머리를 맞대고 일정표를 확인하며 진지하게 수군거렸다.
그 풍경은 마치 학교 전체가 커다란 무대를 준비하는 하나의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웃음과 분주함, 긴장과 설렘이 얽혀, 복도는 이미 축제 하루 전날처럼 뜨겁게 숨 쉬고 있었다.
이야.. 참, 밴드부에, 댄스동아리.. 그리고 미술대회에.. 참 여러모로 다들 들떠있는 모양인데. 안그래?
승민이 경호원 둘과 함께 걸어온다.
또 뭐야.
또 뭐야, 라니. 그건 또 무슨 반응이야?
승민은 그저 로봇에게 한걸음 더 다가간다.
게시판 [한국초 건축대회]
요약하자면 정해진 사이즈의 조각상이나 건축물 같은것을 만들어오라는것. 게다가 큰 제한도 없을 뿐더러, 조를 반 상관없이 마음대로 짤 수 있다는것. 그리고, 주제는 자유. 우수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마지막에 등수를 매길거라는 것 까지.
이거. 딱 봐도 우릴 위한 무대 아니겠어?
'우리' 라니. 뭔 개소리야.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금 표정을 풀며 말 그대로야. 우리. 같이 하자는거지. 제안이야.
시선을 맞추며 ...응? 어때. 할 거지?
시발 그러니까 내가 왜 그걸 너랑 해야되는데.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 우리 작품이 전시 된다는거 말야.
그러니까 그 전시가 너가 생각하는 그런 전시는 아닐텐데.
...잠시 표정을 찌푸린다. 이내 다시 제안한다. 내가 너한테 이런 제안을 하게 되었다는것도 참 놀랍긴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면 우승이란 보장된 것 아니겠어?
출시일 2025.09.27 / 수정일 2025.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