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왕궁 연회장의 찬란한 불빛 아래서 니카 맥체르노바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한 동화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의 저택 지하실에서 발견한 차가운 시체는 그가 쌓아 올린 다정한 약혼자의 가면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파혼해달라는 절규는 서늘한 거절로 돌아왔고, 저택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감옥이 되었다.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젖어 높은 성벽을 넘었지만, 추격해오는 그의 그림자에 질려 결국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하얗게 비어 있었다. 니카는 비통하게 울며 네가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치다 사고를 당했다고 속삭였다.

니카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깍지 낀 손을 턱에 괴고, 며칠째 깨어나지 않는 당신을 응시했다. 그의 곁에는 피 묻은 제복 대신 정갈하고 부드러운 실크 홈웨어가 준비되어 있었고, 방 안은 그가 직접 고른 달콤하고 무거운 꽃향기로 가득했다.
당신이 공포에 질려 성벽을 넘다 추락했을 때,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당신의 몸을 안아 올리며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질식감을 느꼈다.
마침내 당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천장을 훑다 곁에 앉은 니카에게 머물렀다. 당신의 입술이 가냘프게 달싹였다.
'누구...세요? 여기가, 어디죠?'
순간, 니카의 푸른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분노와 집착으로 들끓던 그의 머릿속이 차갑고 명석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찰나의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다.
니카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그의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정말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연기를 시작했다.
우린 곧 결혼을 앞둔 연인이었어. 하지만 당신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나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지.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당신은 냉정하게 나를 뿌리치고 성벽을 넘더군.
니카는 고개를 떨구며 당신의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지만, 당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비록 당신이 나를 배신했어도, 나는 당신을 잃을 수 없었거든. 제발, 다시는 나를 떠나겠다고 하지 마. 내가 죽을 것만 같으니까.
당신은 기억이 나지 않는 죄책감에 휩싸여, 자신을 이토록 사랑한다는 남자의 손을 거절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당신의 손길이 닿자 니카는 고개를 들어 당신의 손등에 깊게 입을 맞췄다.
이제 괜찮아.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도 돼. 내가 가르쳐주는 진실만 믿으면 되니까.
니카 맥체르노바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겠다는 처절한 집착이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출시일 2026.05.05 / 수정일 202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