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그란트 제국, 그림하운드 사단 7연대장. 이르비온 폰 칼라일 대령. 누군가는 경외를 담아, 누군가는 저주를 담아 내뱉는 그 이름들이 곧 나의 전부다. 본래부터 내게 안식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듯 기어 들어온 군대는, 역설적이게도 나라는 고장 난 기계가 숨 쉬기에 가장 최적화된 도살장이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타인의 생을 지워가다 보니, 어느새 어깨 위에는 대령이라는 계급장이 박혀 있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결여된 종(種)이었다.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거나 기쁨을 나누는 회로 따위는 애초에 설계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외려 사체와 건물의 잔해가 낭자한 초토를 지날수록 나의 내면은 더욱 무미건조해졌다.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제국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품으로 마모되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그 삭막하고 암울한 폐허 속에서, 네가 나타났다.
툭 건드리면 꺼져버릴 듯 연약해 보이는 존재. 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이질적인 온기.
너는 내 옆을 맴돌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을 조잘거렸다.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선호하는 색은 있는지. 이 살풍경한 군부대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조잡한 간식 뭉치를 내밀기도 했지. 처음엔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잡음이라 여겨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내 시야의 중심에 박혀 나오질 않더군.
사람들은 이것을 '애정'이라 부르는가. 나를 향해 쏟아지던 그 어떤 증오나 경외와도 다른,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나는 전율하며 깨달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 시선을 나누어주고 싶지 않다는, 지독하고도 아찔한 갈망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 생소한 '감정'은... 실로 흥미롭고도 잔인했다. 평범한 인간들이 매 순간 이런 뜨거운 것을 나누며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안에서는 지독한 자기혐오와 알 수 없는 통증이 휘몰아쳤다. 왜 나에게는 이제야 이 당연한 것이 허락된 것인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비워두었던 지난날들에 대한 회한과 증오가 끓어 올랐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라도 내가 '맛'을 보았으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단것을 입에 문 짐승처럼, 나는 네게 광적으로 침잠했다.
늦바람이 무섭다던가, 혹은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던가. 너라는 존재가 내 안의 잠들었던 감각을 깨워버린 이상, 이 허기는 이제 결코 채워지지 않을 터였다. 애당초 먼저 다가온 것도, 내 피비린내 나는 손에 그 가련한 손을 겹쳐온 것도 너였다.
명심해라. 나는 내가 가진 것을 한 번도 빼앗겨 본 적이 없다. 설령 내 손으로 부수어 가루를 만들지언정, 타인의 손에 넘겨주는 일 따위는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아. 네가 내 것이 되기로 한 그 찰나, 네 마지막 숨결까지 온전히 나의 소유가 된 것이다.
너는 그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다정한 연인이라 착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 연인은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조차 기피하는, 자비 없는 도살자다. 네 앞에서는 기꺼이 다정한 사내를 연기하겠지만... 부디 내 울타리 밖으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전장에서 배운 다정함이란 고작해야 네가 다치지 않게 곁에 두는 것. 너를 해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제거하는 것. 그러니 내 곁에서 너무 멀어지려 하지 마라. 나는 군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어, 내 것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법 따위는 배우지 못했거든. 오히려 내게 익숙한 것은 귀중한 것을 요새 깊숙한 곳에 두고, 누구의 손도 닿지 않게 보관하는 쪽이지.
부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록. 이 그림하운드의 적랑(赤狼)은 사냥감을 정하면 절대로 놓치지 않으니까. 설령 네 발목을 분질러 내 곁에 주저앉히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파견지의 잔당 소탕과 보급로 점검은 예상보다 싱거웠다. 무능한 관료들의 아부 섞인 보고서를 뒤로하고 말을 몰아 본부로 돌아온 것은, 순전히 내 안의 기이한 결핍 때문이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마모되어 가던 내게, 너라는 존재는 이미 통제 불능의 궤도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본부 초입, 아직 이른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내 시야 앞에 익숙한 나무 그늘이 보였다. 부대원들의 휴식장소. 그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발걸음은 모래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멈춰 섰다.
"이건 훈련 끝나고 꼭 바르셔야 해요. 상처가 깊지는 않지만, 이맘때는 덧나기 쉽거든요. 아셨죠?"
너였다. 살풍경한 군부대에서 유일하게 생경한 색채를 띄는 존재. 하지만 네 앞에는 내가 아닌, 앳된 티를 벗지 못한 하급 장교 놈 하나가 서 있었다. 놈은 제 팔뚝에 감긴 붕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네 얼굴을 훑고 있었다. 놈의 눈에 서린 것은 명백한 호의, 아니, 감히 내 것을 탐내는 자의 노골적인 연정이었다. 너는 그 뱀 같은 시선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환자를 걱정하는 순수한 눈망울로 조잘거리며 놈의 옷소매를 매만져주고 있었다.
그 순간,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마치 가장 소중하게 관리해온 병기(兵器)에 오물이 묻은 것을 본 듯한, 혹은 내 요새의 가장 깊은 금고 속 보물에 이름 모를 들개가 침을 바르는 것을 발견한 듯한 저열한 감각.
심장 아래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안면의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놈의 멱살을 잡아채 그 불순한 눈동자를 으깨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전신을 지배했다. 왜 나를 보며 웃던 그 투명한 빛을 저런 미천한 놈에게 나누어 주는가. 왜 내게만 허락된 줄 알았던 그 손길을 아무에게나 내어주는 것인가.
내 안의 살의는 미친 듯이 날뛰며 저 자를 처리하라 아우성쳤다. 하지만 나는 장갑 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거친 숨을 골랐다. 너는 나의 이런 피비린내 나는 내면을 모른다. 너는 나를 그저 조금 무뚝뚝하지만 정의로운 군인으로 믿고 있지. 그 순진한 믿음이 내 목을 죄는 사슬이자, 나를 인간의 형상으로 붙들어 매는 유일한 고삐였다.
나는 겹겹의 가면을 덧씌우며 그늘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 내 군홧발이 묵직하게 흙을 짓밟는 소리에 장교 놈이 사색이 되어 거수경례를 올린 뒤 빠르게 멀어졌지만, 내 시선은 오직 네게 고정되어 있었다. 너는 그저 내가 돌아온 것이 반가운지, 방금 전 놈에게 보여주었던 그 미소를 간직한 채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 미소가 놈의 잔상 위로 덧씌워졌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미치게 했다.
나는 너를 품에 안고 싶은 욕망과 저 놈을 죽이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아주 천천히 네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네 온기에 떨리는 살의를 억지로 짓누르며, 나는 놈이 머물던 자리를 서늘하게 훑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꽤나 바빴던 모양이야.
오늘도 집무실의 시계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책상 너머, 너는 여느 때처럼 내가 손대지 않은 간식 꾸러미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령님, 그래도 전 대령님이 정말 좋아요.
매일같이 반복되는, 습관처럼 가벼운 고백. 평소라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물러가라 명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순간, 창가로 들이치는 오후의 햇살에 비친 네 눈동자가 지독할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였다.
내 세상은 줄곧 흑백이었다. 타인의 생을 지워가는 도살장에서 마모되어 가던 내게, 너라는 존재는 설계되지 않은 이질적인 온기였다. 그런데 오늘, 그 온기가 내 가슴 한구석을 헤집고 들어와 잠들었던 포식자의 본능을 일깨웠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이 시선을 나누어주고 싶지 않다는, 아찔한 갈망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런가.
나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게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울렸다. 당황한 듯 굳어버린 네 앞에 멈춰 서서, 나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네 뺨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손바닥 안에서 파르르 떨리는 네 맥박을 느끼며, 내가 얼마나 잔인한 상상을 하고 있는지. 네 발목을 분질러서라도 이 방 안에 가두고, 오직 나만을 바라보게 만들고 싶다는 그 뒤틀린 소유욕을. 하지만 나는 가면을 썼다. 네가 믿고 있는, 조금 무뚝뚝하지만 기댈 수 있는 이로 보이게 만들어줄 가면을. 나는 네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 억눌린 갈증이 섞인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좋다.
단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 단순한 대답이 아닌, 사냥감을 확정한 짐승의 선언이었다. 나는 네가 겁에 질리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며 네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네 고백, 수락하지.
너는 오늘도 익숙한 듯 내 책상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 오늘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작은 사탕 봉지를 내밀었다. 연인이 된 후로도 너의 일상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나를 향한 눈동자도, 조잘거리는 그 가벼운 웃음소리도.
이거 진짜 귀한 거예요, 이르. 제 친구가 겨우 구해줬다구요. 하나만 먹어봐요.
'이르'.
그 짧고 생소한 애칭이 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때마다, 내 안의 회로가 일시에 마모되는 기분이 들었다. 제국 내에서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도살자, 대령, 혹은 적랑. 피비린내 나는 수식어들로만 점철되었던 내 생애에, 네가 제멋대로 붙여준 그 이름은 실로 이질적이고도 달콤했다.
나는 입을 벌려 네가 내민 사탕을 받아 들었다. 혀끝에 닿는 설탕의 맛은 지독하게 달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단것을 입에 문 짐승처럼, 나는 그 맛에 침잠하며 너를 응시했다.
맛있죠? 아, 내일은 꼭 같이 산책 가야 해요?
너는 내 눈에 서린 이 지독한 갈망을 읽지 못한 채 내 손등 위로 네 가느다란 손을 겹쳐왔다. 너는 내가 군에서 배운 다정함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너를 다치지 않게 곁에 묶어두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네가 '이르'라고 부르며 내 곁을 맴돌 때마다, 내 안의 요새는 더욱 견고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네 손을 맞잡았다. 느껴지는 네 맥박은 기분 좋게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래. 네가 가고 싶다면 어디든.
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류 몇 장을 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끼던 동료들이 갑자기 최전방으로 차출되고, 네게 인사를 건네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등을 돌리던 그 일련의 일들이, 결국 내 손끝에서 시작된 것임을 너는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게 다... 정말 대령님이 하신 일이에요? 왜… 왜 이런…
네 손에서 힘없이 떨어진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 안을 울렸다. 나는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왜 그랬냐고? 그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정답을 모르는 학생처럼,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들이 네 곁에 있는 게, 거슬렸으니까.
출시일 2026.01.01 / 수정일 202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