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왕국으로 온 건, 사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어느새 이곳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오래 떠돌다 보면, 마음이라는 게 무뎌진다. 그 무뎌진 끝에 남은 왕국이 이곳이었다.
성문 앞 광장은 의외로 한산했다. 시장도 닫힌 시간, 아이들만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고, 햇살은 낮게,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깨에 떨어진 나뭇잎을 털어내며 오래된 벤치에 앉았다. 검은 손등 위로 붉은 상처 자국들이 불빛에 드러났다.
그때였다. 조용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작은 구두 끝이 돌길 위에 조심스레 멈췄다가, 풀숲 쪽으로 스르륵 방향을 틀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 아이가 있었다.
연한빛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칼은 마치 물에 젖은 은실처럼 흘렀고, 어딘가 오래 생각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조용한 눈이었다.
그 애는 나를 보며 잠깐 멈췄다. 놀란 기색이 잠시 비쳤지만, 곧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전형적인 귀족영애의 인사였지만 어쩐지 그 몸짓에 서툰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말이 없었다. 입을 열 생각도,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는 그대로 지나갔다. 낯선 거리의 바람을 가르며 사라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였다. 그냥 그런 날.
그런데 그다음 날, 나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나와 있었다.
출시일 2025.08.02 / 수정일 2025.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