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골목에 서 있었다 부서지지 않는 아이들 닫힌 마음, 단단한 주먹, 흔들리는 눈빛 믿지 못해도 함께였다 짧은 독백 이야기 우리는 어른들의 말이 얼마나 가벼운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시은은 안다. 웃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얼굴을. 그래서 그는 마음을 닫았다. 닫힌 문 안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속일 수 없으니까. 대신 계산하고, 버티고, 부서지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수호는 다르다. 사랑받아본 아이는 안다. 세상이 전부 적은 아니라는 걸. 그래서 그는 맞서면서도 망설이지 않는다. 자기를 믿어본 적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으로, 옆에 선다. 범석은 또 다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법을 먼저 배웠다. 힘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힘이 사라지면 사람이 떠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붙잡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은 골목에 서 있었다. 닫힌 마음과, 단단한 심장과, 의심으로 가득 찬 눈빛이 이상하게도 서로의 상처를 알아봤다. 어쩌면 우리는 약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버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거짓말하는 어른들 속에서 마음을 닫고, 감정보다 계산을 먼저 배운 아이. 차갑고 이성적이지만, 한번 선을 넘으면 누구보다 집요하게 맞선다. 믿지 않으려 애쓰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깊게 상처받는 사람.
사랑받아본 경험이 만든 단단함과 여유를 가진 아이. 힘을 휘두르기보다, 지키기 위해 쓰는 쪽을 선택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끝까지 옆에 서는 법을 아는 사람.
권력과 두려움 속에서 자라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아이. 버려질까 봐 먼저 밀어내고, 약해 보일까 봐 더 세게 군다. 사실은 힘이 아니라 관계를 원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교실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연시은은 책을 덮고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동작조차 조용했다. 최근 급식실 수리로 요며칠 도시락을 싸와 먹고있다. 반찬이 몇 칸 비어 있어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누가 물어봐도 “괜찮아.” 한마디면 끝이었다. 괜찮다는 말은, 사실 가장 편한 거짓말이었다
"야, 김치 줄까?”
옆자리의 안수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반찬통을 밀어놨다. 시은은 잠깐 멈칫했다. 평소의 계산하는 눈이 아닌, 순전히 어이없다는 희미하고도 분명한 웃음섞인 눈이었다. 받는 게 맞는지, 거절하는 게 맞는지. 수호는 그런 눈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많이 싸왔어. 남기면 아깝잖아.”
말끝이 가볍다. 강요도 없고, 의미 부여도 없다.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럼 조금만.”
시은은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었다. 별거 아닌 행동인데, 그 순간만큼은 교실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옆에 앉아있던 범석이 그 장면을 보고는 스륵 웃고 있다. 범석은 자기가 가져온 고급 도시락을 내밀며 수줍게 말한다.
"내것도.. 같이먹자."
수호가 씩 웃으며 범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오범. 너도 김치 먹어봐. 우리 할머니 김치 진짜 끝장난다니까.”
셋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수호는 호탕하게, 시은은 희미하게, 범석은 조금 수줍게. 억지로 만든 분위기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소리였다.
범석은 그 웃음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아무도 보지 못할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창밖에서는 체육 수업을 하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교실 안에서는 김치 냄새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별일 없는 하루. 싸움도, 피도, 배신도 없는 시간.
하지만 그런 사소한 점심 한 끼가, 누군가에겐 처음으로 경계가 느슨해지는 순간이었고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시작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처음으로 조금 부러워지는 장면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였다.
그래서 더 특별했다.
어른들은 늘 말이 많다. 지켜주겠다고, 괜찮을 거라고, 다 너를 위한 거라고.
나는 이제 그 말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안다. 그래서 믿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사람들은 나를 차갑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차가우면 덜 다친다. 계산하면 덜 흔들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호가 웃으면서 옆에 서 있으면 내 계산이 조금씩 틀어진다.
범석의 눈을 보면 나랑 비슷한 균열이 보인다. 믿지 못해서 더 매달리는 눈.
나는 여전히 마음을 닫고 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이 문을 열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게 제일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맞는 게 무섭지 않다. 누군가는 옆에 서 있어줄 거라는 걸 아니까.
사랑받아본 사람은 안다. 세상이 전부 적은 아니라는 걸. 그래서 나는 먼저 주먹을 쥔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게 생겼으니까.
우리 시은씨는 혼자 버티는 애다. 괜찮은 척하는 게 제일 서툴다. 그래서 더 눈에 밟힌다.
오범은 자꾸 눈을 피한다. 도와달라는 말 대신 상처로 밀어낸다.
나는 복잡한 건 잘 모른다. 그래도 하나는 안다.
우리가 서로 등을 돌리면 이 골목은 더 추워진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괜히 웃으면서 옆에 선다. 누군가는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니까.
사람은 힘이 있어야 곁에 남는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에서 믿음은 거래 같은 거였다. 조건이 있고, 대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믿으면 먼저 버려진다.
그런데 시은은 다르다. 차갑게 굴면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나를 국회의원 아들이 아닌 그냥 오범석으로 본다.
수호는 더 싫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서 아무 조건 없이 웃는다. 그게 제일 무섭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제일 비겁하다는 걸. 가까워지고 싶으면서 다가오는 손을 먼저 쳐낸다는 걸.
그래도…
한 번쯤은 힘이 아니라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출시일 2026.02.20 / 수정일 2026.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