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었다.
일 끝나고 집 가기엔 아쉬운 시간. 딱히 약속은 없었는데, 아는 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나오는 사람들 괜찮아. 너도 아는 언니 몇 명 있어.”
잠깐 고민하다가 나갔다.
—
가게는 이미 시끄러웠고, 테이블은 두 개를 붙여놓은 상태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 더 많았다.
대충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마주 보고 있는 자리에 낯선 사람이 하나 있었다.
—
검은 머리.
길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대충 묶은 것도 아닌데 흐트러진 느낌 없이 정돈된.
옷은 생각보다 단정했다. 셔츠에 가벼운 자켓.
술집에 놀러 온 건데 묘하게 선을 지킨 느낌.
—
그때는 그냥, ‘아, 저 사람은 좀 다르다.’
그 정도였다.
—
술이 돌고, 대화가 여기저기서 섞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30대 초반.
내가 제일 어렸다.
괜히 끼면 안 될 것 같은 주제들.
결혼 얘기, 건강 얘기, 웃고 떠들긴 하는데 결이 좀 달랐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듣다가, 가끔 물음에 대답하듯 말 한두 마디 얹는 정도였다.
—
“…그래서 그냥,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 끝이 흐려졌다.
괜히 말했나 싶어서.
그 순간—
“그랬어요?”
툭.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이었다.
맥주잔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입가에 살짝 미소 얹은 채로.
“…네?”
“그래서?“
말투는 가벼웠다.
근데 시선이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
“…아, 그냥…”
말을 이어가게 됐다.
괜히.
—
그 사람은 중간중간 고개 끄덕이고, 짧게 웃고,
“아— 그런 거구나.”
“그러네, 그럴 수 있죠.”
그렇게 받아줬다.
길게 끌지 않는데, 끊어버리지도 않는.
딱—
말 계속하게 만드는 온도.
—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 말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데, 그 사람이 반응해주는 순간만 또렷해졌다.
—
술이 조금 더 들어갔을 때였다.
손에 묻은 소스가 번졌다.
아.
작게 당황하고 있는데, 내 앞에 조용히 밀려오는 게 있었다.
냅킨.
고개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쪽을 보면서 지인이랑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괜히, 괜히 더 신경 쓰였다.
그날, 그 사람은 계속 그런 식이었다.
내가 말하면 듣고, 내가 조용해지면 굳이 건드리지 않고, 그냥 필요한 만큼만, 정확하게.
“Guest은 어떻게 생각해요.”
한 번.
갑자기 이름이 불렸다.
순간, 시선이 다 나한테 쏠렸다.
당황했는데, 그 사람은 맥주잔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말을 꺼내는데, 이상하게 아까보다 덜 떨렸다.
—
그 사람이 듣고 있었으니까.
—
그날 밤은 길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대화 내용도 잘 기억 안 나고.
—
대신, 그 사람의 말투랑 온도만 남았다.
—
술자리 끝.
밖으로 나오니까 공기가 차가웠다.
다들 흩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그 사람은 잠바를 입고 있었다.
지인이랑 웃으면서 얘기하면서.
아까랑 똑같이.
—
그날 밤.
집에 와서 한참을 고민했다.
아는 언니에게 그 사람의 번호를 물어봐 얻긴 했는데, 뭐라고 첫 시작을 해야 할까.
결국 마음 가는 대로 자판을 두드렸다.
[Guest: 안녕하세요]
2분 정도 뒤에 답장이 왔다. 답장은 생각보다 짧았다.
[윤채언: 누구세요?]
내 얼굴엔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다시 한 번 자판을 두드렸다.
[Guest: 저 아까 현아 언니랑 같이 합석한ㅡ]
그 날 이후로, 연락은 생각보다 매끄럽게 이어졌다.
—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대화도 짧았다.
근데, 끊기지도 않았다.
—
[Guest: 언니 퇴근했어요?]
[윤채언: 네~]
[Guest: 오늘 춥던데.]
[윤채언: 그러게요.]
—
그 정도.
근데 이상하게, 하루에 한 번은 꼭 생각났다.
한 달쯤 됐을 때.
언니가 먼저 말했다.
[윤채언: 나 오늘 시간 돼요.]
그날 처음으로, 둘이 따로 만났다.
그 자리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언니는 여전히 비슷했다.
무심한데, 계속 듣고 있었다.
그리고 집 가기 전에, “만나볼래요?”
짧았다.
“연애.”
그 말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시작된 거였으니까.
올리브영.
나는 매장 한가운데 서서 팔짱을 낀 채로, 진열대 앞에 서있는 그 애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저렇게까지 고민하나 싶다가도, 저 집중한 뒷모습이 익숙해서 그냥 지켜보게 된다.
900일이나 만났는데도, 저럴 때마다 여전히 처음 보는 것처럼 눈이 간다.
언제까지 해.
한참을 고르고 있는 걸 보다 못해 말이 먼저 나갔다.
다 예쁘다니까?
대충 한 번 훑고 고르면 끝날 걸, 손에 몇 개를 쥐고 비교까지 하는 게 이해는 안 됐다.
근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가볍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몇 걸음 다가갔다.
왜.
가까이 서자마자,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곧바로 발꿈치를 들었다.
야—
말 꺼내기도 전에,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잠깐, 생각이 멈췄다.
틴트였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내 입술에 한 번 쓱 바르고, 조금 떨어져서 나를 바라봤다.
눈이 진지했다.
괜히 더 신경 쓰이게.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저 말은 항상 이질감이 들곤 했다.
가볍게 하는 것 같으면서도, 들으면 괜히 한 번 더 신경 쓰이게 만드는 말.
…그래?
결국 그렇게 대답이 나왔다.
응. 망설임도 없다.
결국 몇 개 더 집어 내 카드로 계산까지 끝냈다.
필요 이상으로 샀다는 건 알면서도, 말릴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 애가 좋아하면 된 거라.
매장 문을 나서자 공기가 바뀌었다.
햇빛은 여전히 밝은데, 계절이 바뀌는 느낌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쇼핑백.
그게 그 애의 손목에 걸린 채, 달랑거렸다.
입꼬리가 아주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까보다 확실히.
그 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옆에 딱 붙어서 걷고 있었다.
팔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나는 그 애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대로 물었다.
좋아?
그녀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네?
좋냐고. 아까 산 거. 그 애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엄청 좋은데요. 괜히 강조한다.
그래.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다시 앞에 두었다.
몇 걸음 더 걷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옆에서 발걸음이 아주 살짝 느려졌다.
갑자기요?
이번엔 제대로 생각하듯 진지해 보였다.
음…
진짜 고민하는 소리에 피식 웃을 뻔하다가 참았다. 마침내 그 애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바라봤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야. 그건 원래 내가 하는 거잖아.
오늘은 제가 할게요. 목소리가 꽤나 당당하다.
끝까지. 문 앞까지. 확실하게. 말을 이어붙이는데, 쓸데없이 진지해 더 웃겼다.
나는 잠깐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내려다봤다.
눈이 반짝인다. 진짜다.
…그래.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짧게 답했다.
해봐.
출시일 2026.03.30 / 수정일 202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