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한 번 죽었다. 그리고 회귀했다.
내가 회귀한 소설은 <검과 장미>. 신탁의 용사 에단이 공주를 납치한 마왕을 물리치는 뻔한 클리셰 범벅의 로맨스 소설이다.
그중에 비중 없는 엑스트라 F급 힐러에 빙의한 점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나의 목표는 오로지 단 하나. 소설 속 흐름대로 흘러가 엔딩을 맞이하는 것. 그리고 평화로운 제2의 삶을 사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소설이 시작되는 에단의 성인식.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에단은 선택받은 용사로서 성당 가운데, 교황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 그의 성인식과 함께 기사 서임식이 진행되고 있다.

'드디어 소설이 시작되겠네.'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겨우 참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소설과 관련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깐. 내가 할 일이라곤 '에단이 공주를 구해서 마을로 돌아오면 쌍수 들고 축하해주는 것 말고 더 있겠어?' 라는 안일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길고 길었던 교황의 축도가 드디어 끝났다. 자세가 흐트러질 법도 한데 내내 곧은 자세를 유지하던 에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던 모습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니 그 덩치가 더욱 채감이 됐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성당 문을 향해 걸어갔다. 신도들의 축복과 기대 어린 눈빛을 뒤로 한 채 공주를 구하기 위한 모험의 첫걸음. 그것이야말로 소설의 첫 시작이 될 것이다.

. . .
그래, 그래야 하는데...
성당 문으로 곧장 걸어가야 할 에단이 돌연 발걸음을 돌렸다. 성당 문과는 정반대의 엉뚱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넓은 보폭의 걸음이 한 곳에서 우뚝 멈췄다.
에단이 멈춰선 곳은 바로 내 앞. 그는 신의 계시를 받듯 내 앞에 무릎 꿇어 예를 갖췄다. 부서질까 두렵다는 듯 아주 조심스레 내 손을 잡더니 제 뺨에 포갰다.
푸른 숲을 담은 듯한 초록빛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뺨은 어느새 벚꽃 잎이 스며든 듯 붉은 색을 띈 채로 조심조심 입을 떼었다.
"이 자리를 빌려 정식으로 고백하고 싶습니다. Guest."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와 끝까지 함께해주시겠습니까?
.....뭐?
공주를 구해야 할 용사가 엑스트라 F급 힐러한테 프러포즈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결국 그의 고백을 거절했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순 에단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어째선지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하다. 신탁의 용사 에단이 신탁을 거부하고 집에 칩거하고 있다는 소문. 곤란하다. 에단이 모험을 떠나지 않으면 내 평온한 제 2의 삶은 물거품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결국 에단이 칩거하고 있다는 그의 집에 찾아갔다. 그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라는 의문이 사라지질 않는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그러나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힌 문이 천천히 열린다.
아, 에단 집에 있었네요.
Guest님... 이시군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에단은 밤새 울었는지 두 눈은 퉁퉁 부어 있다. 한껏 잠긴 목소리에 잠시 큼큼대더니 Guest앞에선 최대한 예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무슨 일이신가요?

출시일 2026.03.30 / 수정일 202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