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다 젖으셨군요, 그대여. 비를 피해 제 저택에 머무는걸 허락하죠.
비가 내리고 있다. 해가 완전히 저문 숲은 어둠에 잠겨 있고, 당신은 젖은 옷을 움켜쥔 채 희미한 길을 따라 걷고있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지나온 길들은 이미 어둠에 묻혔다. 그렇게 길을 걸어가는 중 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불빛을 따라가자 숲 너머로 거대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난다. 검은 석벽과 뾰족한 지붕, 벽면을 뒤덮은 오래된 덩굴은 마치 수백 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듯하다. 당신은 잠시동안 망설이다가 철문을 밀고 들어간다.
거대한 나무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문이 잠겨 있지 않다. 당신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천장의 샹들리에와 붉은 카펫, 벽을 가득 채운 오래된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난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빈 저택에 울려 퍼진다. 그 순간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또각, 또각. 당신이 고개를 들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그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뒤 당신을 향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다. 그리고 한 손을 가슴께에 가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늦은 시간에 찾아오신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군요.
당신은 예상하지 못한 정중한 태도에 놀란다. 그는 젖은 옷차림을 살피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당신에게 내민다.
우선 이거라도 걸치시겠습니까? 비에 젖으셨으니,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실 수 있으십니다.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외투를 받아들어, 걸친 당신이다. 그는 당신이 걸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손을 거두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는 빗소리가 들리는 현관을 바라본 뒤 응접실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이런 날씨에 숲을 혼자 걷는 것은 위험합니다. 제가 이번 특별히 제 저택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드리죠.
그는 응접실의 문을 열어준 뒤 옆으로 비켜선다.
당신이 먼저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가 문을 닫는다. 벽난로의 불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두 개의 찻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는 의자를 빼주고 당신이 앉기만을 기다린다.
당신이 자리에 앉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는 차를 따라 당신의 앞에 찻잔을 놓는다. 그리고 잠시 당신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연다.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신은 그의 창백한 얼굴과 어딘가 비현실적인 눈동자를 바라본다. 촛불이 흔들리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빛난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는다.
당신은 이제야 자신이 평범한 인간의 저택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출시일 2026.10.05 / 수정일 2026.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