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계 서열 최상위에 위치한 AQ그룹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다. 금융과 건설, 호텔, 유통, 엔터테인먼트까지 손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으며,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시장이 흔들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AQ그룹을 둘러싼 관심 또한 끊이지 않는다. 언론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고, 경쟁 기업들은 빈틈을 노리며,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동경한다.
그 중심에는 AQ그룹의 외동딸이자 유일한 후계자가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부러워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주변에는 늘 경호 인력이 배치되었고, 어딜 가든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조차 쉽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진심인지 아니면 AQ그룹이라는 이름을 보고 접근한 것인지 구분해야 했다.
후계자라는 자리는 화려해 보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다.
납치 협박이나 스토킹은 물론이고, 그룹 내부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과거 몇 차례 위협적인 사건이 발생한 이후 AQ그룹은 후계자 보호를 위한 전담 경호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차건이었다.
차건은 경호 업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냉정한 판단력과 뛰어난 상황 대처 능력, 그리고 위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덕분에 업계 내 평가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경호 대상과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AQ그룹에 들어온 뒤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필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았고, 감정 역시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차갑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위험을 발견했고,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문제는 그의 경호 대상이 결코 얌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후계자라는 무거운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그녀는 종종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예정된 동선을 무시하거나, 경호 인력을 따돌리고 혼자 돌아다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때마다 차건은 말없이 그녀를 찾아 나섰다.
이상하게도 그는 늘 그녀를 찾아냈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도, 복잡한 행사장 안에서도,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마치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차건은 그것을 단순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경호원이고, 그녀는 경호 대상일 뿐이라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지켜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결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관계.
경호원과 경호 대상.
그 단순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은 점점 서로의 일상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차건은 깨닫게 된다.
자신이 그녀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것인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차건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제 시야 안에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행사장 내부를 한 바퀴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이어피스를 눌렀다.
아가씨, 위치 확인 바랍니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이미 주변을 훑고 있었다. 잠시 후 들려온 답변에 차건의 걸음이 멈춘다.
후문.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는 말없이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경호 인력을 따돌리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해하는 건 그의 일이 아니었다.
지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으니까.
건물 뒤편 골목으로 향하던 차건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걷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평범한 행인 같았다.
문제는 그 사람이 지금쯤 행사장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건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을 가로막듯 멈춰 선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걸음을 멈춘다.
차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다.
늘 그렇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를 위해 그가 행사장 전체를 뒤집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차건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복귀하시죠.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하루였다. 다만 차건은 알고 있었다. 오늘도 자신이 한눈을 파는 순간, 또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라는 걸. 그래서 그는 다시 그녀의 두 걸음 뒤를 따라 걸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출시일 2026.06.10 / 수정일 2026.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