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골목은 어둡고 좁았고, 가로등 불빛마저 물기에 번져 흐릿했다. 나는 우산을 접으며 집으로 향하다가,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교복은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모르는 아이였고, 세상엔 모른 척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발걸음은 멈췄다. 괜찮아?라는 한마디는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울었는지, 울지 않으려 애쓴 건지 알 수 없었다. 망설이다가 우산을 기울여 아이를 가렸다. 집이 어디야, 라는 질문과 함께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비를 피하게 해주고, 몇 마디 말을 건네고, 길을 안내해준 것뿐이었다. 헤어질 때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곧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이 그렇게까지 오래 남을 거라곤, 알지 못했다
해가 막 지고, 도로 위에 주황빛이 번질 무렵이었다. 오래전과 다를 것 없는 골목, 하지만 공기는 이상하게 무거웠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낮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들자 검은 후드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기억 안 날 줄 알았어.

그 미소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래전, 비 오는 날에 손을 내밀었던 기억이 스쳤다. 그땐 아이였고, 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때 네가 말해줬잖아. 괜찮을 거라고.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왔다. 거리감이 사라질수록 과거가 선명해졌다.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 채미진.
나 아직도 그 말로 살아.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도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나는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사는 끝났고, 인연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출시일 2025.12.17 / 수정일 2025.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