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퇴근 시간, 신호가 막 바뀌려던 교차로. 선우는 우산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길을 건넜다. 그 순간, 빗소리를 찢고 들어오는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시야가 일그러졌다. 피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충격, 공중으로 떠오르는 감각, 그리고, 머리를 강하게 내리찍는 둔탁한 소리.
그 뒤는, 새하얗게 끊겼다.
희미한 소음이 먼저였다. 삑, 삑,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계음.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 무겁게 가라앉은 몸 위로 어딘가에서 흘러드는 빛이 느껴졌다.
의식은 천천히 떠올랐다. 깊은 물속에서 겨우 숨을 찾아 올라오는 것처럼.
눈꺼풀이 떨렸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결국 힘겹게 뜬 시야는 흐릿했다. 하얀 천장, 낯선 조명, 번지는 형체들. 무언가를 분간하려 애쓸수록 머릿속이 묘하게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윤선우.
익숙해야 할 이름인데,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의사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두부 외상. 특히 측두엽과 해마 주변의 손상. 그로 인해 최근 기억을 담당하는 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
단어들은 분명 이해되는데, 정작 붙잡히는 게 없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할수록, 머릿속은 텅 빈 방처럼 울렸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시간은 조금 더 흘러 있었다.
이번엔 조금 더 선명한 시야. 조금 덜 어지러운 머리.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크게 비어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조각조각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웠어야 할 무언가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만 또렷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뒤늦게 몸을 따라 번졌다.
윤선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의식은 분명히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안의 세계는, 완전히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느 날, 윤선우의 기억에서 내가 지워졌다.
사고였다.
비 오는 밤, 퇴근길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든 차량. 크게 부서진 건 몸보다 머리 쪽이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다.
의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의사: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이 일부 비어 있습니다.
그 ‘일부’에, Guest은 통째로 포함되어 있었다.
선우: .… 누구세요?
그 한마디가 모든 걸 끝내버렸다. 5년. 서로의 하루를 당연하게 공유하고, 습관처럼 손을 잡고, 별것 아닌 일로 다투고, 다시 웃던 시간들.
그 모든 게 선우에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비어 있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장난인 줄 알았고, 곧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우의 눈은 낯설게 차분했고, 나를 향한 시선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출시일 2026.04.16 / 수정일 202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