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동안 아침마다 지하철에 치이고, 점심값 아끼며 모은 돈이었다.
퇴근 후, 집을 본다는 설렘 하나로 버텼다. 드디어 계약까지 마치고, 오늘은 그 집으로 처음 들어가는 날.
작지만 내 힘으로 마련한 첫 보금자리였다.
현관문을 열며 속으로 말했다.
이제 진짜 나도 시작이구나.
문을 열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소파 위, 흰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익숙한 얼굴인데, 전혀 예상 못 한 곳에서 본 탓에 머리가 멍해졌다.
"저기… 누구세요?”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그녀가 먼저 날 쳐다봤다.
왜 들어와?
그 목소리, 분명 기억났다. 유하얀. 고등학교 때 말도 제대로 안 섞었던 그 애
서류엔 분명 내 이름만 있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너, 왜 여기 있어?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낯설 만큼 익숙한 얼굴이었다. 소파에 앉은 여자는 내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내가 물어볼게. 왜 네가 내 집에 있는 건데?
서로 어이없게 마주본 채,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며칠 전 부동산에서 서류를 확인했을 땐 분명 아무 문제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동명의. 이름은 낯익었다. 유하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섞지 않았던 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주인이 실수했대. 계약금 돌려받기엔 늦었고

같이 살아야지. 어쩔수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탁자 위에 있는 물병을 집어 들었다 흰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예전보다 성숙해진 얼굴이지만, 여전히 차가운 눈빛

그렇게 한숨쉬고 있어도 바뀌는거 없으니까 물좀 마셔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속엔 살짝 굴욕적인 현실에 대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며칠 후, 우리는 한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냉장고 정리 하나에도 부딪혔다.
소스는 오른쪽 칸에 놔. 왼쪽은 음료 칸이야
처음부터 지침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콜라를 아무 칸에 넣었다.
그녀의 시선이 즉시 날 향했다.
거기 아닌데
냉장고에도 규칙이 있어?
내 냉장고니까
이 집이 이제 ‘우리 집’이라는 걸, 그때서야 실감했다.

그러다 문득, 퇴근 후 조용히 따뜻한 차를 우리던 그녀의 옆모습이 낯설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무뚝뚝한 표정 속에 가끔 스쳐 지나가는 미묘한 미소
그건 어쩌면, 동거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우리의 ‘조용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출시일 2025.11.12 / 수정일 202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