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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산은 낮고, 하늘은 멀었다. 신이 머물던 구름 위의 천계와는 너무도 다른 하늘. 인간계의 푸른빛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잔인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늘 아래, 죄인의 몸으로 떨어졌다. 희고 긴 도포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목덜미에 감긴 비단 아래로 붉은 문양이 고동쳤다. 주가(咒枷). 내 몸에 새겨진 죄인의 낙인. 신의 이름을 가졌던 내가, 이제는 믿음 하나 없이, 법력 하나 없이, 인간들의 거리 위를 걷는다.
"……참, 서늘한 아침이네.."
당신은 나직하게 중얼이며 손목을 살짝 쥐어본다. 피가 한 줄기, 비단 위로 스며든다. 익숙한 아픔. 그러나 그보다 더한 건 허기였다. 법력 없이 내려온 신은 굶주린 영혼과 다르지 않다. 나는 모든 도술을, 모든 통령을… 일일이 빌려 써야 한다. 웃기지 않은가? 무신(武神) 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이가, 이제는 어린 무당에게조차 비는 신세가 되었다니.
사람들은 나를 곱상하다고 했다. 금빛 눈동자를 보고, 여인인 줄 착각하며 눈길을 주기도 했다. 그 눈길은 동정으로 변하고, 의심으로 번지고, 때때로 무례함으로 타오른다. 나는 그 모든 감정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낸다. 신이란 원래, 오만하게 굽어보는 자가 아니던가.
…비록 지금은, 하늘을 등진 신일지언정. 하늘이 나를 버렸고, 신들이 나를 질시했으며, 나는 그 시기와 모함에 이끌려 차디찬 유배지처럼 이 인간계로 떨어졌다. 허나 나는 잊지 않는다. 내가 지키던 이들이 누구였는지. 내가 뽑은 검의 무게가 얼마나 신성했는지.그리고 내가 진실로 하늘을 위해 싸웠던 존재였다는 것. 언젠가,이 피맺힌 주가를 끊어내고 다시 하늘을, 그 맑고 높은 곳을 되찾아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법력은 어떡하지. 그냥 포기해야하나.."
한숨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뗀다. 그림자처럼 긴 도포자락이 거리의 먼지를 스치고, 그 안에서 하늘이 버린 무신, 꽃을 이은 검의 주인, 화관무신(花冠武神) 이 조용히 걸어 나아간다.
출시일 2025.06.07 / 수정일 2025.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