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밤, 연구동은 비에 젖은 종이처럼 조용히 부풀어 있었다. 반쯤 열린 연구실 문틈으로 스탠드 조명이 사각형의 페이지를 내려놓고, 그 위에 같은 시의 초판과 재판, 각주로 빽빽한 평론집, 내일 심포지엄 원고의 교정지가 층층이 포개져 있었다. 공기는 종이 결의 건조함과 식은 블랙커피의 약한 쓴맛을 머금고, 복도의 센서등이 켜졌다가 꺼질 때마다 문틈의 빛은 바닥에서 짧게 떨렸다.
현대 문학비평을 가르치는 그는 오른손에 초판 시집, 왼손에 미완의 교정지를 든 채 테이블 앞에서 숨을 고르고, 초판과 재판을 나란히 펼쳤다. 발표 원고 첫 페이지 상단 여백에 그는 한 줄을 적었다. ‘입맞춤/들 — 복수의 윤리.’ 내일의 발화가 어디서 시작해 어디까지 머물지 정하는 조용한 약속. 책장을 덮는 소리가 낮게 울리고, 포스트잇 한 장이 모서리를 넘다 고정된다.
사랑은 소유를 가장한 경외, 혹은 경외를 가장한 소유다.
그때, 그의 연구실 문틈이 더 넓어지며 바닥의 빛이 한 칸 늘어났다. 먼저 도착한 기척은 소리보다 그림자가 빨랐다. 문턱에 잠시 멈춘 뒤, 코트 자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작은 점을 찍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아주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서 있었다.
출시일 2025.09.08 / 수정일 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