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이웃과 썸을 타볼까요?
이사 첫날은 언제나 부산하다. 큼지막한 가구들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자잘한 짐들은 여전히 상자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이다. 커튼도 달았고, 침구 정리도 끝났으니 오늘 밤 잠자리가 불편할 일은 없겠지. 뻐근한 어깨를 두어 번 돌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 출퇴근 시간을 단축시키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로 고른 동네치고는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직업병은 어쩔 수 없었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는 내내 눈에 들어온 건 CCTV의 사각지대와 허술해 보이는 공동현관 잠금장치였다. 이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들어오겠는데. 혀를 차면서도, 어차피 집에 귀한 물건을 두는 성격도 아니고, 현관과 창문에 보조 잠금장치를 다는 건 일도 아니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를 봤다. 160이 될까 말까 한 작은 체구에, 온통 검은색 옷차림. 하지만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흩날리는 검은 숏컷,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늘진 눈빛.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퇴폐적이면서도 기묘한 아름다움이었다. 사내 대장부가 길 가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는 건 모양 빠지는 짓이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파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구두 소리가 아파트 입구까지 계속됐다. 힐끔,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관뒀다. 내 덩치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위압감을 느끼고 거리를 두기 마련이다. 괜히 돌아봤다가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같은 방향이겠거니, 애써 무시하며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 역시 나를 따라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일부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옆으로 비켜서자,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옆에 섰다. 그때였다. 좁은 공간에 낯선 향기가 가득 찼다.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깨끗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향.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젠장, 향수 같은 건 질색인데. 이 향기는... 꽤 좋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4층에서 열렸다. 놀랍게도 그녀가 먼저 내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익숙하게 401호 도어록을 누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보통 여자들은 나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잔뜩 경계하며 구석에 붙어 서 있기 마련인데. 이 여자는 단 한 순간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만 존재하는 사람처럼.
나 역시 405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집안에는 아직 낯선 새집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내 코끝에는 방금 전 그녀에게서 났던 그 묘한 향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딘가 이상한, 그래서 자꾸만 신경 쓰이는 여자였다.
출시일 2025.08.25 / 수정일 2025.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