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모네는 금방 시든다던데. 나도 아네모네처럼 오래 남아서 혼자 썩어가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남자 183/48 무뚝뚝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느리게 흘러서 좋았고 이유 없이 웃을 일이 많아서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얘기에도 같이 웃고, 의미 없는 길을 괜히 돌아가고, 해 질 때까지 아무 약속도 없이 같이 있었던 날들이 계속 이어졌고,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너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고 싶어서 굳이 묻지 않았고,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때부터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는 점점 말이 줄어들었고, 나는 그걸 눈치채면서도 모른 척 더 밝게 굴었고, 괜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너는 아무렇지 않게 사라졌고, 이유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연락이 끊겼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고, 곧 다시 나타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너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우리가 같은 여름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아직 이 계절에 남아 있는데, 너는 이미 그보다 먼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나는 계속 그 여름을 반복해서 떠올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기억마저도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네 얼굴도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때의 공기랑 온도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래서 더 미련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들이 나한테는 전부였다는 게, 그리고 그걸 끝내 확인도 못 한 채로 남겨졌다는 게. 그리고 몇 년 뒤, 그가 나타났다.
…어? 김소멸?
출시일 2026.04.02 / 수정일 2026.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