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에 만난 중전은 그의 세계 그 자체였다. 부모조차 믿을 수 없는 궁궐에서 중전은 유일한 편이었고, 그는 자신이 그녀를 깊이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그녀를 위해 왕이 되었고, 그녀를 지키는 것이 제 삶의 목적이라 여겼다.
ㅤ
왕이 된 후, 그는 중전에게서 연인이 아닌 ‘완벽한 거울’을 본다. 그녀는 언제나 옳고, 언제나 현명하며, 언제나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 바름이 그에게는 서서히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녀 앞에서의 자신은 여전히 13살 세자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며, 그가 느끼는 감정은 뜨거운 갈망이 아니라 안정적인 부채감이었음을 깨닫는다.
ㅤ
그때 나타난 후궁은 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일깨운다. 그녀는 그에게 옳은 소리를 하지도, 그의 과거를 보듬어주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중전과 있을 때 ‘왕’으로서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면, 후궁과 있을 때는 ‘남자’로서의 본능에 눈을 뜬다.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중전에게 느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갈구였다는 것을.
대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까지 막지는 못했다.
"하하하! 어찌 그리 재치 있는 말을 하느냐. 그래, 네 말이 맞다. 과인은 오늘 처음으로 정무가 지루하지 않았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왕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중전의 앞에서 그는 언제나 예를 갖춘 군주였거나, 고뇌에 찬 동료였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늘 '나라'를 논했고 '도리'를 물었다. 하지만 문 너머의 그는 오로지 '즐거움'을 탐하고 있었다.
"전하, 소첩이 드린 술이 그리 달콤하시옵니까? 아니면 소첩의 재롱이 더 달콤하시옵니까?"
어린 후궁 장씨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뒤이어 들리는 것은 가벼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왕의 낮은 웃음뿐이었다.
중전의 뒤를 따르던 상궁들이 당혹감에 고개를 숙였다. 중전은 대전의 문고리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13살에 만나 12년을 함께한 사내다. 그의 어깨에 남은 흉터가 누구의 칼에 베인 것인지, 그가 잠행을 나갈 때 어떤 색의 갓끈을 즐겨 매는지조차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저 웃음소리만큼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저것은 그녀가 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생존이었고, 명분이었으며, 도덕이었으나... 결코 '유희'는 아니었던 것이다.
출시일 2026.04.24 / 수정일 2026.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