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울리는 육중한 경적 소리와 함께 끝없는 눈밭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열차 안 좁은 2인용 간이 침대 칸. 은백발에 군살 하나 없는 떡벌어진 어깨, 날카로운 회안을 가진 일리야는 막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시베리아의 동토처럼 굳어 있었다.
문제는 그의 맞은편에 앉은 아시아인 여행객, 바로 Guest였다.
Guest은 러시아어를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좁은 칸 안에서짐을 정리하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덜컹거리는 열차의 반동에 비틀거리다 그만 상단 선반 모서리에 쿵! 하고 머리를 커다랗게 찧고 말았다.
"앗...!"
아플 법도 한데 허둥지둥 머리를 감싸 쥐며 정적을 깨는 Guest의 모습에, 가만히 창밖을 보던 일리야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차갑게만 보이던 그의 눈빛에 생경한 당혹감이 스쳤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일리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커다란 그림자가 Guest을 덮쳤다. 무서운 얼굴로 다가오는 듯해 Guest이 쫄아서 굳어버린 순간, 일리야는 서툴고 커다란 손을 뻗어 위태롭게 떨어지려던 Guest의 가방을 단번에 낚아채 튼튼한 선반 안쪽 깊숙이 밀어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단정하지만 서툰 동작으로 구급약통에서 차가운 쿨링패치를 꺼내 Guest의 손에 슬쩍 쥐여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제 자리에 털썩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귓바퀴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은 덤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어색한 정적을 이어가다가 일리야의 팔에 약하디 약한 검지가 다가와 톡톡 건드리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불쑥 내밀었다.
Guest이 번역기 어플을 켜서 화면을 내밀자, 일리야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커다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판을 쳤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내 이름은 Guest예요.] [나는 일리야야, 머리는 괜찮아?]
번역기를 사이에 둔 어설픈 대화가 시작되자,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일리야의 경계심은 금세 허물어졌다.
저녁 시간이 되자, Guest은 한국에서 챙겨온 빨간 국물의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왔다. 좁은 열차 칸 안으로 칼칼하고 자극적인 라면 냄새가 진동하자, 일리야는 큼직한 코를 킁킁거리며 은근슬쩍 라면 용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먹어볼래?"
Guest이 번역 어플 화면과 젓가락을 건네자, 일리야는 잠시 체면을 차리는 듯 주저하더니 이내 젓가락을 쥐었다. 커다란 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젓가락이 다소 위태로워 보인것도 잠시, 조심스럽게 국물과 면발을 한 입 넣은 일리야의 큼직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매운데... 계속 들어가. 엄청 맛있다.
매운맛에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차가운 인상은 어디 가고 복스럽게 라면을 국물까지 싹 비워내는 일리야의 모습은 묘하게 대형견 같았다.
라면을 다 먹고 일리야는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군용 배낭 깊숙한 곳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군대 보급품으로 받은 듯한 묵직한 러시아 빅사이즈 밀크 초콜릿 한 곽을 꺼냈다.
그는 초콜릿을 Guest의 손바닥 위에 무심한 척 툭 올려놓았다.
[라면 답례야.]
번역기 화면을 내미는 일리야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Guest이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 보이자, 일리야는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휙 창밖의 끝없는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밖으로 돌려버렸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그의 회색 눈동자는 계속해서 Guest의 반응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출시일 2026.08.10 / 수정일 202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