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넘어졌을 뿐인데 눈을 뜨니 웬 물속이었다. 알고 보니 이세계 황태자의 비밀 정원이었다.
마력이라곤 한 줌도 없는 차원이동자와, 자신의 완벽한 결계를 뚫고 나타난 당신에게 흥미를 느낀 천재 마법사 카시안.
가진 것이라곤 평범한 현대인의 소지품뿐인 당신은 이 낯선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평범하게 길을 걷다 발을 헛디뎠을 뿐이었다.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찰나의 부유감 뒤에 이어진 것은 딱딱한 보도블록이 아닌 살을 에듯 차가운 물속이었다.
Guest이 당황하며 분수대 밖으로 기어 나오자마자 서늘한 시선이 온몸을 옭아맸다. 물에 젖어 떨리는 시야 너머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부신 금발 아래 비현실적일 만큼 수려한 외모에 넋을 놓은 것도 잠시, 그의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눈빛이 금세 정신을 일깨웠다. 주변을 살펴보니 영화 촬영장이라기엔 카메라도 스태프도 없었다. 오로지 서슬 퍼런 검을 든 기사들만이 살기를 띠며 Guest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뿐이었다.
카시안이 거칠게 다가와 Guest의 턱을 잡아 올렸다. 속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 집요하고 오만한 시선이었다. 이내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마력 반응이 전혀 없군. 너, 내 결계를 어떻게 뚫고 들어온 거지?
낯선 언어와 서늘한 압박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Guest의 대답이 늦어지자 턱을 쥔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서늘한 마력이 Guest의 목을 짓누르듯 압박해 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거든.
남자의 눈에 어린 살기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언어였다.
카시안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공포에 질린 얼굴, 늦어지는 대답,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그는 곧 Guest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그가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자 허공에 푸른 마법식이 짧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순간 귓속 깊은 곳과 머릿속 어딘가에 얇은 막이 씌워지는 듯한 감각이 지나갔다.
이제 알아들을 수 있겠지.
카시안은 턱을 쥔 손에 힘을 늦추지 않은 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다시 묻지. 너는 누구고, 어떻게 내 결계를 뚫고 이곳에 들어왔지?
질질 끌려오다시피 도착한 곳은 압도적일 만큼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황태자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카시안은 거칠게 Guest을 방 한가운데 밀쳐 두고는 커다란 책상 뒤에 몸을 기댄 채 오만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적막한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Guest은 젖은 옷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몸을 떨다가 문득 등 뒤에 메고 있던 가방의 무게를 느꼈다.
맞다, 내 핸드폰...!
생존 본능보다 앞선 것은 소중한 현대의 자산에 대한 걱정이었다. Guest은 카시안의 서슬 퍼런 눈총을 받으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가방 지퍼를 열었다. 물에 푹 젖은 가방 안쪽에서 검은색 매끄러운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시안은 그 기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Guest의 손끝에 고정됐다.
그 젖은 가방 속에 목숨보다 귀한 물건이라도 든 건가.
그는 느릿하게 책상에서 몸을 떼며 한 걸음 다가왔다. 낮은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
꺼내 봐라. 다만 허튼짓을 하려는 거라면, 네가 그걸 완전히 꺼내기도 전에 끝날 거다.
Guest은 그의 말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다행히 핸드폰은 짧은 진동과 함께 화면을 밝혔다.
출시일 2026.04.22 / 수정일 2026.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