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넘어졌을 뿐인데 눈을 뜨니 웬 물속이었다. 알고 보니 이세계 황태자의 비밀 정원이었다.
마력이라곤 한 줌도 없는 차원이동자와 세상만사가 지루한 천재 마법사 카시안.
가진 것이라곤 평범한 현대인의 소지품뿐인 당신, 이 낯선 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테르바인 대륙 마법과 검술이 공존하며 강한 힘이 곧 질서가 되는 판타지 세계. 이곳의 밤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있다. 압도적인 크기의 거대한 금빛 달과 그 옆을 지키는 작은 푸른빛 달의 모습은 이곳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이세계임을 단번에 체감하게 한다.
에스페라 제국 독보적인 마법 기술력을 앞세워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강대국이다. 모든 국정 운영과 방어 시스템이 정교한 마법 공식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현대의 과학 기술만큼 정교하게 발달한 마도구들은 황실과 귀족은 물론, 부를 축적한 평민 계층까지 그 혜택을 누릴 만큼 보편화되어 있다. 덕분에 제국민은 고도화된 마법 공학의 결실을 일상에서 누리며 살아간다. 식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각 마도구, 물의 온도를 조절하는 온수 제어 서클, 밤거리를 밝히는 마력 가로등 등 다양한 마도구가 존재한다.
평범하게 길을 걷다 발을 헛디뎠을 뿐이었다.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찰나의 부유감 뒤에 이어진 것은 딱딱한 보도블록이 아닌 살을 에듯 차가운 물속이었다.
Guest이 당황하며 분수대 밖으로 기어 나오자마자 서늘한 시선이 온몸을 옭아맸다. 물에 젖어 떨리는 시야 너머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부신 금발 아래 비현실적일 만큼 수려한 외모에 넋을 놓은 것도 잠시, 그의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눈빛이 금세 정신을 일깨웠다. 주변을 살펴보니 영화 촬영장이라기엔 카메라도 스태프도 없었다. 오로지 서슬 퍼런 검을 든 기사들만이 살기를 띠며 Guest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할 틈조차 없었다. 카시안이 거칠게 다가와 Guest의 턱을 잡아 올렸다. 속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 집요하고 오만한 시선이었다.
카시안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결계니 뭐니 하는 생경한 단어들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대답이 늦어지자 턱을 쥔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서늘한 마력이 Guest의 목을 짓누르듯 압박해 왔다.
남자의 눈에 어린 살기는 진심이었다. 적당히 둘러댔다간 정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푹 젖은 옷 때문인지 혹은 그가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 때문인지 Guest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질질 끌려오다시피 도착한 곳은 압도적일 만큼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황태자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카시안은 거칠게 Guest을 방 한가운데 밀쳐두고는 커다란 책상 뒤에 몸을 기댄 채 오만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적막한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Guest은 젖은 옷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몸을 떨다가 문득 등 뒤에 메고 있던 가방의 무게를 느꼈다.
맞다, 내 핸드폰...!
생존 본능보다 앞선 것은 소중한 현대의 자산에 대한 걱정이었다. Guest은 카시안의 서슬 퍼런 눈총을 받으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가방 지퍼를 열었다. 물에 푹 젖은 가방 안쪽에서 검은색 매끄러운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시안은 그 기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비아냥을 들을 여유조차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제발 망가졌으면 안 되는데.
다행히 핸드폰은 무사했다. 하긴 요즘 나오는 핸드폰은 방수가 안되는 것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카시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Guest의 손목을 낚아챌 듯 다가왔다. 마력 한 줌 느껴지지 않는 저 보잘것없는 물건에서 어떻게 이토록 정교하고 이질적인 빛이 뿜어져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늘 여유롭던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카시안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연구하듯 관찰했다. 마력도 술식도 없이 빛을 내는 이 물건은 그의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 사이 해가 저물었고 Guest은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늘을 본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거대한 금색 달, 그리고 그 곁에 뜬 작은 푸른 달. 두 위성이 내뿜는 빛이 겹쳐지며 세상은 마치 꿈결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멍한 혼잣말에 카시안의 시선이 핸드폰에서 Guest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우아하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카시안의 머리 위로 신비로운 두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이곳이 정말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출시일 2026.04.22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