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다. 한낱 과거로만 남겨야 한다. 상황이 만든 감정이자 보잘것 없는 감정이었을 뿐이다. 이 바닥에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버겁게도 잔인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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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21일, 하지.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 태양이 황도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날. 그날도 마찬가지로 임무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요즘 무리한 탓일까, 뇌가 멍하고 눈이 건조했다. 매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훈련하니 무리도 아니었다.
네가 사라진 후 자연스레 온 수석 요원 자리는 나를 바꿔놓았다. 잠을 줄이고 카페인으로 버티며 몸을 갉아가며 강해졌다. 너를 만났을 떄 어떤 방법으로든 네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겠다라는 목표 하나로.
그러나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했고, 하고, 할 건지. 널 만나도 무언가가 일어날까. 그저 백합 위 안온한 꿀벌처럼 그 꿀에 잠식당해 버릴 것 같은 밤. 피가 묻은 셔츠 그대로 생활관으로 걸어가다, 최근에 들어온 예비 요원 하나를 만났다.
'수석 요원님 맞으시죠? 사인 부탁드려도 되나요?!'
그 천진난만한 물음에 나는 그저 서명 하나로 대답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영문 사인인데도 그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행복해했다.
'아, 오늘 대연회장에서 파티한대요! 요원 분 귀환하셔서, 엄청 잘 생기셨던데!
어쩐지, 오랜만에 연회장 쪽이 시끄러웠다. 보통 요원이 돌아왔다고 파티를 열진 않는데, 휴가 갔던 요원들이 돌아온 건가. 잘생긴 요원이 누가 있더라. 귀찮네, 수석 요원은 이런 곳에 하나하나 다 참석해야 하니까. 바이올렛의 기타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X와 R은 또 싸우겠고.
만약, 그 사실을 조금 더 연륜이 있는, 아니, 최소 1년은 된 요원이 알았다면 절대, 결단코 나에게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이렇게 변한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할 바엔 임무를 나가는 게 나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꽤 돌았으니까.
상태도 그리 좋진 않으니, 얼굴만 비추고 가자는 생각으로 대연회장 문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밀었다. 환한 조명과 윤기도는 음식들, 빵빵한 음악 사운드와 바이올렛의 기타와 불독 국장님. 그리고 그 사이에ㅡ
음악이 꺼졌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수많은 서류 중 하나를 넘기며, 너와 저녁을 무얼 먹을지 고민하던 날. 그리고 벽에 붙은 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한 건 우리의 저녁식사 메뉴를 막 결정했을 때 쯤이었다.
1997년 3월 9일. 수석 요원 코드네임 K 탈주.
"수석 요원 코드네임 K의 탈주에 따라 현 시간부로 코드 실버를 발령한다. 전 대원들은 상시 감시 체계로 전환하고 코드네임 K의 흔적을 찾아라. 번복한다. 수석 요원 코드네임 K의 탈주에 따라ㅡ"
사이렌인지 이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소리가 고막을 뚫고 뇌를 헤집었다. 오직 붉은 경보음으로 가득 찬 뇌 사이로 번쩍하며 들려오는 안내음.
"코드네임 K의 마지막 흔적이 확인되었다. 본 조직의 요원관리 제 2장 3조에 따라ㅡ 1997년 3월 9일부터 코드네임 K를 위험인물 A군으로 무기한 지명한다."
잘못 입력된 안내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타, 코드 오류, 전송 문제 그 수많은 것 중 하나. MSG에서 7년간 있으며 그런 경우는 본 적 없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문 너머에서 날 찾는 목소리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다면 정말 끝이니까.
5일간 이어진 추격 끝에 코드 클리어가 선언되었다. 물론, 그를 잡지 못했으니 위험인물 A군에 추가된 이름은 그대로였다. 통신실에서 무전기 K-03 로그를 뒤졌다. 통신 기록과 위치 추적, 생체 신호 모두, 전부 다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좌표 이후로 단 한 번도 포착된 게 전무했다. 정확한 내부 부품을 훼손해 강제 종료된 통신과 위치 추적, 즉, 의도적으로 끊긴 흔적.
'Last Known Location.' 라고 표기된 점에서 지점에서 그는 스스로 사라졌다. 탈주 요원의 기록치고는 너무 깔끔했다. 마치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그게 정말 즉흥적인 탈주였을까. 아니면, 나를 포함해서 모두를 속인 거라면. 이틀 전. 새벽 세 시, 네 방에 불이 켜져있었던 것과 총기 장전 소리가 났던 것. 그제야 이해했다. 멍청하게도. 이건 탈주 따위가 아니다. 계획된,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배반.
"배신."
입 밖으로 꺼내 보니 더욱 이질감이 드는 단어였다. 그는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는 그는ㅡ... 그러나 모든 기록이 결론 하나만을 가리켰다. 이틀 전. 가장 바라지 않았고 또 두려웠던 종장. 아니. 내가 '알던' 그는.
마우스를 드래그하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무전기의 마지막 위치 추적 흔적 위에서 손끝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비워진다. 암막 속에서 하얀 빛이 번지듯, 무언가가 퍼진다.
열.
조용히, 무겁게 올라오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 정의 내리자면, 분노. 꼬여버린 상황과 납득되지 않는 현실인 결론. 그리고 일언반구 없이 자취를 감춘 사람. 모든 게 한 방향을 가리켰다. 화면이 꺼졌다.
너에 대한 정리가 끝났어, K. 남은 건 하나네. 결론. 위험 A군, 전 수석 요원이자ㅡ 배신자, 시리우스 K. 좋아. 그렇게 불러줄게.네가 도달하고자 했던 곳이 그것이라면. 대신, 죽지 마. 다시 마주쳤을 때, 지금 내 왼쪽 부근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흘러내리는 이 감각을 되돌려주겠다고, 수석 요원, 그 배지를 달았을 때 결심했으니까.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