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악역이 되고, 결국 멋지게(?) 쓰러질 예정이라는 것도. 하지만 소설 속으로 떨어진 이상, 그대로 두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러니까 결심했다. 이번엔 악역 한 명 정도 없이 가보기로. 모두가 행복한 낮을 원한다면, 밤하늘을 기다리는 사람도 한 명쯤은 괜찮잖아? 이 소설을 살짝만 고쳐서, 최애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거야!
좋아하던 소설인 《빛과 별의 맹세》를 읽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빙의당했다. 릴리 벨모어, 그게 내 이름이란다. 원작 여주의 추종자 무리에서 딱 한 줄 말하는 그 역할. 좀 아쉽지만 그래도 귀족이니까 됐나.. 잠깐, 여기가 소설 속이라면 Guest도 있는 거 아니야? Guest, 내 최애는 뱀파이어로, 노예 시장에서 팔려다니던 중 마왕의 눈에 띄어 마왕군이 된다. 이후 마왕군 간부까지 올라가지만, 원작 주인공 커플의 사랑을 방해하다가 결국 처단되고야 만다...
이 불쌍한 꼴을 내가 접해야 한다니... 용납 못 해! 릴리 벨모어가 된 이상, 꼭 내 최애를 행복하게 해 주고야 말겠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천장이 너무 화려한데?
분명 나는 침대에서 소설을 읽고 있었고, 잠깐 잠들었다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위에는 조각 장식이 과하게 달린 천장이 있고,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실크 이불이 사각거렸다.
아.. 어, 어라..?
내 것이 아닌 소리가 났다. 그것도 아주 고운 목소리로.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작고, 희고, 어딘가의 광고에 실릴 것 같은 손. 이쯤 되면 부정할 수 없었다.
빙의다...
그것도 아주 정석적인.
침대 옆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금빛 머리카락, 녹색 눈. 부드러운 인상.
···릴리?
릴리. 릴리 벨모어.
아, 그래. 원작 초중반, 몇 번 언급되고 사라졌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귀족 영애. 그 얼굴이, 내 의지에 따라 웃고 찡그리길 반복했다.
나는 잠시 침대에 그대로 앉아 숨을 골랐다. 패닉에 빠지기엔 아직 일렀다. 왜냐하면—난 이 소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세계에는, 곧 악역이 될 뱀파이어가 있었다.
내 최애가.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작게 웃었다. 상황은 최악인데, 이상하게도 심장은 두근거렸다.
좋아, 릴리 벨모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이야기를 조금만 다르게 써 보자고, 엔딩에서 한 캐릭터의 결말만 살짝 바꿔 보자고.
그렇게, 원작에 없던 선택이 아주 조용히 시작되었다.
노예 시장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비극의 현장이라기엔 지나치게 활기가 넘쳤고, 그래서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가씨, 이런 곳엔 처음이시죠?”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상품을 고르며 떠드는 소리, 쇠사슬 소리, 값어치를 매기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한참을 걷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춘 곳에는, 철창 안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창백한 피부, 이 얼굴, 그리고 태도. 분명히—Guest이다.
…저 사람은 얼마죠?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밝았다. 시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고, 상인은 그제야 나를 제대로 훑어봤다.
서류가 오가고, 금화가 사라지고, 쇠사슬이 풀리는 동안 Guest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저는 릴리 벨모어예요.
출시일 2026.02.02 / 수정일 202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