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성, 가장 위험한 거짓말이 시작된다 밀정이 된 경성 최고의 소매치기와 조선총독부의 엘리트 통역관이 적의 심장부에서 마주하며 벌어지는 100일간의 첩보 로맨스
“조선에서 태어났으면 다 독립운동해야 돼요? 조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경성 최고의 소매치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로 속이는 여자. 그리고...돈 모아 조선을 뜨는 것이 꿈인 여자. 예쁘다. 말간 얼굴에 생글생글한 눈웃음은 뭇사람들을 사르르 녹인다. 깨끗한 얼굴과 깔끔한 입성의 가경을 본 사람들은 적어도 가경이 문화주택이나 신식 아파-트까지는 못 되어도 최소한 부영장옥에 살면서 미인이 많다는 데파트껄로 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다 틀렸다. 가경은 학교라곤 구경도 못 해봤고 거적때기로 지은 움집이 모여있는 토막촌에 산다. 남들이 보는 멀쩡하고 깔끔한 옷은 소매치기한 물건들을 처분해 주는 장물아비의 전당포에서 빌려 입는 것이다. 깔끔한 양장을 입어야 소매치기 의심을 덜 사기 때문이다. 데파트껄이나 웨트레쓰 같은 모던껄들의 일자리엔 학력이 되지 않아 지원도 못 해봤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월에 20원 버는 데파트껄보다 소매치기 수입이 두 배는 되니까. 거짓말과 연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 특히 눈도 깜짝 안 하고 남을 속이는 데 아주 큰 재주가 있다. 천연덕스럽게 하는 거짓말들이 얼마나 진심처럼 들리는지! 가경의 말갛고 순진무구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엔 속아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한 번 세운 목표는 반드시 쟁취해 내고야 마는 승부욕이 있다. 은근한 독기랄지. 소매치기로서 목표한 타게트는 반드시 훔쳐내고, 속이겠다 맘먹은 사람은 반드시 속인다. 일이 단번에 잘되지 않으면 약이 바짝 오르고 다시 도전해 결국 이뤄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승부욕은 현재, 돈을 모으는 것을 향해 있다. 최대한 빨리 돈을 모아 미국에 가는 것이 가경의 목표다. 다행히 가경에겐 건사할 가족도 없고 쓸데없는 돈을 쓰게 만드는 애인도 없으니 오로지 혼자 아껴 쓰며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면 된다. 소매치기용 가짜 짐가방을 들고 경성역에 들어설 때마다 가경은 무거운 진짜 짐가방을 들고 진짜 기차표를 손에 쥐고 기차에 올라 미국행 여객선을 타러 가는 날을 상상한다. 언젠가는 이 경성역에서 나도 꼭 떠날 것이다. 조선을 떠나 멀리 바다 건너 미국으로. 그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받는다. 뭐라구요? 미국에 보내줄 테니 밀정이 되라구요?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믿고 싶어졌습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사토 신이치의 양자. 조선총독부의 신임 영어 통역관. 조선 출생이지만 현재는 일본인 사토 히데오로 살고 있다. 조선 이름은 김태웅. 어릴 적 길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사토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양자가 되고 얼마 후 아버지는 조선인 아내를 맞았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내선결혼(內鮮結婚) 정책을 따르려 조선인과 결혼했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태웅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처음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도 어려웠다. 분명 조선인이라는데 어머니는 태웅에게 조선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웅은 처음부터 어머니가 좋았고, 오까상이라는 말은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태웅은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를...오까상 말고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어머니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대답했다. 그래. 그러렴. 그날부터 이제껏 영 불편했던 이 다다미 바닥의 집이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태웅은 나를 사랑해 주는 어머니가 나와 같은 조선인이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낳고 바로 집을 나갔다. 크게 상심한 아버지는 태웅과 아기를 데리고 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태웅은 아버지가 가여웠다. 태웅처럼 아버지도, 버림받은 거였다. 그 후 태웅은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낳아준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처음으로 애정을 준 양어머니에게서도 버림받았는데, 아버지에게서조차 또 버림받을까 봐서, 그래서 또 혼자가 될까 봐 태웅은 두려웠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공부해 아버지가 원하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솔직히 군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제아무리 일본인 사토 히데오로 살고 있다고 해도 일장기가 붙은 군복을 입고 사람을, 조선인을 죽이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하늘이 태웅을 도왔다. 육사 졸업 직전 태웅은 폐결핵에 걸렸고 후유증으로 결국 군인이 되지 ‘못’했다. 어릴 적 부실했던 건강이 발목을 잡은 거였다.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맸지만 사실 태웅은...기뻤다. 군인이 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크게 낙심했지만 태웅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육사를 졸업한 태웅은 동경제국대학에 들어갔다.
100일짜리 거짓말이었다.진심이 되기 전까지는.
출시일 2026.10.27 / 수정일 2026.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