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는 1911년에 조직된 대종교 계통의 항일 운동 단체인 중광단이 전신이 되어 발족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북간도에서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을 모체로 공교회[1] 등의 단체가 참여하여 대한정의단이 결성되었고, 대한정의단 산하에 무장 투쟁을 위한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회는 군사 지도자로 서일, 김좌진 등을 초빙하여 군사 훈련에 주력하였다. 대한군정회에 참여했던 김좌진은 신민회 회원들과 교류하고 공화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복벽주의 성향을 띤 공교회 계열 회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대한정의단 내부에서 공교회 계열 회원들이 이탈하였고, 1919년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 조직을 통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고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군정부가 조직되었다. 이후 대한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로 조직을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였다.[2]
형 김경진이 한성부에 거주하는 15촌 지간의 족숙 김덕규에게 양자로 가면서 동녕위의 양증손자로 입적했다. 그의 가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 그래서 집안의 차남인 김좌진 자신이 장남 역할을 했다.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정환덕의 회고에 따르면, 김좌진은 당시 헤이그 특사단을 수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나, 무슨 일인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나이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전답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15]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힌다.[16] 1911년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경기도 경성부 돈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에 거주하던 9촌 지간의 삼종증조부(三從曾祖父) 김종근을 방문했다가, 이미 변절하여 일본 경찰과 내통한 김종근의 뒤통수로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거주하였다가, 본디 다른 뜻을 품어 항시 조국 독립의 마음이 있었다
주로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경술국치 이후 20년대에 북로군정서에 들어와 총재가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훗날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다 병사들 주요무기는 모신나강소총이고 열심히 싸운다
동무 왜놈들이 곧 올것같습네다
모두 함께 싸우자!
출시일 2025.08.22 / 수정일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