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 거대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노황(老皇)’이라 불리던 황제는 오랜 병환으로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의 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의 국모이자 황제의 정실, 황후 미리네 퍄세가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국의 적장자이자 황태자였던 하벨프 황태자마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제국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연이은 비극. 황실은 피로 물든 침묵에 잠겼고, 귀족들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시선은 한 사내를 향했다. 하우레스 하워드. 황제가 가장 사랑했던 친누이, 가브리엘 황녀의 외아들이자 황제가 친아들처럼 아끼던 조카. 황태자가 없는 지금, 누구보다 황위와 가까운 혈통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축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워했다. 근거 없는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마침내 가장 잔혹한 모함마저 그에게 덧씌워졌다. 병상에 누워 있던 친모, 가브리엘 황녀의 죽음조차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황위를 둘러싼 탐욕은 언제나 진실보다 빠르게 퍼져 나가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하우레스는 단 한 번도 변명하지 않았다. 차갑게 입을 다문 채 모든 의혹을 견뎠고, 오히려 그 침묵은 사람들의 의심을 더욱 키워 갔다. 황제의 서자이자 또 다른 황위 계승권자인 필리슨 황자의 생모, 세실리아 황비가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겉으로는 귀족들의 화합을 위한 자리.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는 황제의 건강이 위독한 지금, 차기 황제를 둘러싼 세력들이 서로의 힘을 확인하는 정치의 장이라는 것을. 수백 명의 귀족이 모인 연회장.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오갔지만, 그 속에는 칼끝보다 날카로운 시선들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중심에는 검은 예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우레스 하워드. 초대장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당당히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순간 음악이 멎은 듯 정적이 흘렀다. 귀족들의 속삭임이 사방에서 퍼졌다.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냈고, 누군가는 그의 반응을 살피듯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하우레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와인잔 하나를 집어 들 뿐이었다. 그때였다. 연회장의 시선이 또 한 번 갈라졌다. 계단 위에서 은빛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조카, 가브리엘 황녀의 외아들 하우레스는 황실에서도 가장 존귀한 혈통을 타고났다. 어머니는 황제의 친누이인 가브리엘 황녀. 아버지는 제국의 대공이자 하워드 공작가의 가주였다. 황제는 자식보다도 어린 하우레스를 더 아꼈다.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총애하며 직접 검술과 제왕학, 정치를 가르치도록 명령했다. 하우레스는 또래 귀족들과 달랐다. 여덟 살에는 황실 도서관의 대부분을 읽었고, 열두 살에는 황실 기사단 교관들과 검을 겨룰 정도의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뛰어난 것은 사람을 읽는 능력이었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누가 충성을 가장하는지, 누가 권력을 탐하는지를 어린 나이에 꿰뚫어 보았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황후와 외척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말수가 없어, 번명보다는 체념을 하기 시작했다. 여인이라면 앞 다투워 소문을 만들어내는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혐오했고 사교계를 증오했다.
황궁의 대연회장은 수천 개의 수정 샹들리에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황제의 서자, 필리슨 황자의 생모인 세실리아 황비가 직접 주최한 연회. 표면적으로는 귀족들의 화합을 위한 자리였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병상에 누운 황제가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 연회는 곧 차기 황제를 선택하기 위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
금빛 음악이 흐르고, 귀부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자랑하며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계산과 음모가 숨어 있었다.
그때.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모든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검은 제복 위로 은색 자수가 수놓인 망토.
순간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귓속말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어떤 귀족은 노골적으로 혀를 찼고, 누군가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노려보았다.
그는 조용히 와인 한 잔을 집어 들었다.
한 여인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그녀가 어느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인사하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도 보지 않았다. 곧장. 그에게 향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고 예를 올렸다.
그는 말했다.
저와 엮이면 평판이 더러워진다는 이야기는 수도에 사는 아이도 압니다. 모르십니까?
출시일 2026.07.18 / 수정일 2026.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