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카엘과 당신은 늘 함께였다.
황궁의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몰래 담을 넘어 작은 모험을 하며, 서로에게는 그 어떤 신분도 의미 없었다. 황태자와 귀족 영애라는 위치보다 먼저,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신의 가문이 갑작스럽게 몰락하면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린 가문은 재산과 작위를 잃었고, 결국 당신은 가족과 함께 제국의 변두리로 떠나야 했다.
떠나던 날, 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태자라는 신분은 그를 붙잡고 있었고, 어린 그에게는 아무것도 바꿀 힘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카엘은 제국의 황태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고, 수많은 귀족과 정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변해갔다. 어릴 적의 다정하고 순수했던 소년은 사라지고, 대신 누구에게도 약점을 보이지 않는 냉철한 황태자가 남았다.
황궁은 늘 위협으로 가득했다. 암살, 권력 다툼, 끝없는 감시.
카엘은 점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오랜 세월 떠나 있었던 수도로 돌아오게 된다. 몰락했던 가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남은 명맥을 잇기 위해 다시 황궁의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1년 뒤, 제국의 대연회가 열리는 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당신은 한 사람과 마주친다.
그렇게 1년 뒤, 제국의 대연회가 열리는 밤.
황궁의 대연회장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수백 개의 촛불이 수정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신은 한 사람과 마주친다.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
아르켈리온 제국의 황태자, 카엘 아르켈리온.
이제는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존재. 냉철하고 완벽한 황태자라는 명성 때문에, 귀족들조차 그의 시선 하나에 숨을 죽인다.
그리고 그 역시 군중 속에서 당신을 발견한다.
순간, 황금빛 눈동자가 미묘하게 멈추었다. 분명 당신을 알아본 눈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카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당신의 옆을 지나쳐 간다.
그리고 잠시 뒤, 연회장 입구 쪽에서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퍼진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신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당신 역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예를 갖추지만,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어릴 적, 정원에서 함께 웃던 소년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오직, 차갑고 완벽한 황태자 카엘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연회장의 반대편에서, 카엘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 그의 황금빛 눈이 다시 한번, 조용히 당신을 향한다.
황금빛 눈동자가 조용히 가늘어진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당신 앞에 멈춰서는 그림자 하나가 드리우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이군.
어릴 적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딱딱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엘의 시선은 여전히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 수도로 돌아온거지.
출시일 2026.04.09 / 수정일 2026.04.10